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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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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비닐로 만든 우산을 사용했던 시대를 기억한다. 사람과 부닥치면 구멍이 나서 빗물이 샜던 기억도 난다. 아니면, 당시 중고등학생들이 머리를 삭발했기 때문에 비를 맞고 다녀도 옷이 빗물에 젖는 것 외에 머리를 적신다고 비를 맞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진 않았다.

또 비가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새기 때문에 그릇을 받쳐놓고 지냈던 기억도 난다. 물방울 소리가 마치 실로폰 소리처럼 들렸다. 잠을 자다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이불과 옷을 적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처마에 밑에 서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와 손이 지나가는 속도를 비교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비를 싫어하며 살지 않았다.

그 시절 교회당은 그야말로 보금자리였다. 비가 올 때 교회당을 찾으면 우산들과 신발들이 엉겨서 빗물에 젖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마다 교회당에 찾아가서 현재의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며 미래를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목회를 할 때 어렵게 교회를 찾는 분들을 잊을 수 없다. 남편에게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귀한 분들을 기억한다. 그럴 때마다 손을 붙잡고 기도해주는 담임 교역자님들의 간구와 배려는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힘든 짐들을 말갛게 벗어버리는 듯하다. 정말 위로가 교회로부터 받지 않으면 어디서든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힘든 경우에도 부부가 맞대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찬송 부르며, 기도하며, 손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다. 고난 속에 단비처럼 내리시는 주님의 은혜가 놀라웠던 기억을 지을 수 없다.

요즈음은 교회에 재산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어떤 교회는 CCTV를 설치하여 교회에 잠입하는 사람들을 색출한다고 한다. 교회당에 무엇을 두었는지 몰라도 교회당은 만인이 찾아와서 기도하는 처소이지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누구든 와서 피할 수 있는 곳이지 구별된 사람만 찾아와서 거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지 말고 십자가의 신학을 회복해야만 하는 시점에 한국교회의 몇몇 교회들은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등을 찾고 있다고 말씀한다.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를 그분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삶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게 된다.

삶이 고달프다보니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위로를 받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지나쳐서 은사주의에 빠져 잘못되기도 한다. 혹 지나쳐서 가정의 일과 자녀양육의 일을 버리고 교회일 만이 다 인줄 알고 맹신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피곤하지만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고나면 힘을 새롭게 얻는 기쁨으로 살아가지만 제대로 인도를 받지 못하면 되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널 수도 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죄짓는 것처럼. 고난의 시기가 지나 환경이 나아지면 기도할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을 내더라도 생각하는 것이 많아 다른 생각을 한다. 아니면 여러 가지 일로 피곤해 한다. 편안한 시간과 환경은 만들어 일시적인 기쁨을 찾았지만 영원한 기쁨을 잊고 말았다.

고난의 시절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눈물이 썩힌 빵을 먹을지라도 기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미래를 약속하며 참고 견디었던 하루하루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날을 바라보면서 하루의 슬픔과 괴로움을 잊었던 순간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았던 시절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은혜의 좌소를 잊어서는 안된다. 못 박히며 수난을 당하신 주님이 우리의 위로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주위에 여러 고통을 당하는 분들을 본다.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다하여 수고하는 분들을 본다. 그들의 봉사와 헌신이 복되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일들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고난을 당하는 분이 당시에 만나는 하나님을 우리는 그들에게 소개해야만 한다.

고난의 시기에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위로를 베풀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은혜를 갚을 때가 되었다.


라은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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