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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3> ‘레슨 동냥’으로 공고에서 연세대 음대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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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권유로 입학한 인천공고는 남자들의 세상이었다. 거칠었다.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 있었다. 바로 밴드부였다. 열심히 활동했고 훗날 밴드부장까지 했다. 척박한 학교 환경이었지만 밴드부에선 늘 음악과 가까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악기 연주보다는 노래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노래를 사랑했고 기회만 닿으면 노래를 불렀다. 교회는 나에게 늘 무대를 선사했다. 잠을 자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시던 부모님께서도 결국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노래가 그렇게 좋으면 한번 해 보라”고 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난한 시절, 음대에 가겠다고 꿈꾼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돈이 없어 아버지 가게에서 팔던 쌀이나 공산품으로 레슨비를 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노래로 음대에 가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변성기를 잘못 보낸 탓이 컸다. 그래서 선택한 분야가 작곡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7세 때 결정을 내렸다.

레슨 선생님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수소문 끝에 인천에 사시던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을 찾아갔다. 최 선생님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권위자셨다. 난 그분을 닮고 싶어 걷는 모습까지 따라했다.

음대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이 1950년대 중반이었다. 없는 게 더 많던 시절, 음대를 꿈꾸는 것이 쉽진 않았다. ‘레슨 동냥’이 시작됐다. 화성악에 조예가 깊었던 전주온 인천사범학교 음악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학교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시창을 배우겠다고 노래 잘하던 교회 친구에게 부탁해 새벽기도 후 한 시간씩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56년 겨울, 실기시험을 보기 위해 연세대 음대를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대는 백양로 우측,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을 오르던 그날의 떨림이 늘 내게 도전으로 다가온다.

실기 교수님의 손엔 ‘코르위붕겐’(독일의 프란츠 뷜너 교수가 뮌헨국립음대 학생들의 합창 훈련을 위해 만든 교재)이 들려 있었다. 새벽기도 마치고 연습할 때 사용했던 교재였다. 마르고 닳도록 불러 달달 외울 정도로 완벽하게 공부한 책이었다. 어느 페이지를 부르라고 해도 자신 있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공업고등학교였어도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대학 합격자들을 모두 초청해 축하연을 베풀어 주셨다. 아무래도 공고다 보니 대부분 친구들은 공대나 상대에 합격했다. 음대는 나 혼자였다. “공고에서 음대생이 나왔다”며 친구들도 신기해하며 축해해 줬다. 사실 우리 학교 역사상 음대 합격생은 처음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나와 악수하며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윤학원. 넌 우리 학교의 돌연변이야. 축하하네.”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날 음악의 길로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 밤새 감사기도를 드렸던 날이었다. 날 믿고 지지해 주셨던 아버지, 윤효진 장로께도 사랑한다고 전했던 날이었다.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연세대 음대 57학번 윤학원’. 이렇게 호명되는 게 얼마나 설레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운영 교수의 제자가 됐다. 나 교수는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했던 교회 음악가셨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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