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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6> 미국 유학·선명회합창단 지휘자 놓고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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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음악을 듣는 것이 무척 수월하다. 유튜브로는 영상까지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60년대엔 LP판을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불법 복제 레코드인 ‘빽판’이라도 구하면 다행이었다.

동인천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한창 바쁘던 시절, 극동방송의 나진주 선교사가 PD로 일해 달라고 제안했다. 고민이 됐다. 신혼이었던 나로서는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이직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흔든 건 극동방송에 있던 수천 장의 LP판이었다. 음반도 로버트 쇼나 로저 와그너가 지휘한 것부터 흑인영가나 민요,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까지 다양했다.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내가 피아노 레슨이라도 하겠다”며 힘을 실어줬다.

당시 극동방송은 인천 자유공원 언덕에 있었다. 서울로 이사 온 건 1967년이었다. 스튜디오에 앉으면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이곳에 앉아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방송을 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마음껏 음악을 듣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까지 하게 됐다. 내게 극동방송은 일터이자 음악 도서관이었고 학교이기도 했다.

음악방송을 하면서 20∼30대가 참여하는 마드리갈합창단도 창단했다. 우린 1969년 국립극장에서 크리스마스 합창제를 열었다. 합창제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회합창단(현 월드비전 합창단)의 이인형 원장이 내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공덕교회로 찾아왔다.

이 원장은 대뜸 “국립극장에서 기가 막히게 지휘를 잘했던 지휘자가 이 교회에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명회합창단을 맡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세계무대에 나가는 합창단은 오직 선명회뿐이었다. 고작 서른두 살이었다.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게다가 미국의 한 음대로부터 입학허가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유학과 선명회합창단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아내가 유학을 보류하고 선명회합창단을 맡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전히 가난했고 가족들과 함께 가지도 못하는 유학에 대해 아내도 나름 큰 고민을 한 것이었다. 그 부탁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대학 때 인천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던 시절의 행복함도 떠올랐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선명회합창단에는 합창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자.’

1970년 선명회합창단 지휘자로 부임했다. 연습실 문을 열자 환호성이 터졌다. “새 선생님이 오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선명회합창단은 듣던 대로 수준이 높았다. 이미 명성이 자자했지만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이었다. 전업 지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극동방송과 강서구의 합창단 기숙사를 오가며 맹연습을 했다.

당시 선명회합창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로만 구성돼 있었다. 이들에게도 합창이 전부였던 셈이다. 나 또한 그랬다. 아이들과 함께 합창단 수준을 끌어올리는 기쁨이 컸다. 1년 동안 연습한 끝에 1971년 봄 첫 해외 연주 일정이 잡혔다. 아시아 순회 연주였다. 나에게는 첫 번째 해외 연주였다. 떨렸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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