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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독교와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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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규 박사 (대신대학교 한국교회사)

지금부터 꼭 87년 전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YMCA 강당에서 재일 동경 유학생들이 민족 자주 독립을 부르짖었던 것을 기점으로 같은 해 정주, 평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거대한 만세 물결은 민족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요, 겨레의 우렁찬 외침이요, 민족의 절대 절명의 소명이었다. 철통 같은 감시 체제의 강화로 우리 민족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일제 당국의 감시의 눈은 매섭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침탈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 이 민족에게 교회야말로 희망이었다. 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주는 은신처요, 활동 근거지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교회는 위기에 처한 민족지도자들을 보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지도자들과 독립 운동주의자들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요, 때로는 안심하고 숨을 수 있는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교회는 그들에게 자주독립의 정신을 싹 틔우게 하였고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또한 3·1운동은 일제에게 침탈된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이었고 인권을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비록 국권은 빼앗겼지만 민족은 멸망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온세계 만방에 선언한 것이었다. 일제의 잔인무도한 압제 아래에 있었던 한민족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제 1차 세계대전 후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데 호응한 것이다.

3·1운동은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인도주의요,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독창적인 민족문화를 창조한 이스라엘은 나라가 없어도 오늘날까지 종교 공동체인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애굽에서 4백 년, 적국인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이방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3·1운동도 이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3·1운동 당시 조선은 국권을 상실했고 민족만 남아 갖은 압박과 착취를 당했다. 이 때 기독교는 자치의 법과 기구를 가지고 조선민족의 출애굽과 독립을 위해 선교하고 발전해 나갔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조선 민족의 메시야임을 믿었다. 3·1운동은 표면적인 민족 독립운동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울분과 애국심이 자연스럽게 분출된, 그리고 조선 민족의 생령이 분출돼 솟아 오른 운동이었다. 3·1운동은 교회와 민족이 하나되는 신앙운동이요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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