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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님의 나라와 자율적 섭리-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첨부 1


하나님의 나라와 자율적 섭리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마가 4: 26-29) 연구-

The Kingdom of God and the Automatic Providence

 

김 달 수

 

 

I. 들어가는 말: 섭리와 자율성

 

신약학은 문서연구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문서연구로 일관할 때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그 문서가 작성된 시대의 사회적 욕구 이다. 기자들이 자기들 시대의 사회적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예수사건을 신앙고백적으로 해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해석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1세기의 사회적 욕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사회학적 모본(paradigm)을 가지고 들어가서 성서를 해석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대표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는 시민사회의 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와 개인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는 기독교(종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신약성서의 이상인 하나님의 나라가 시민사회의 이상을 포함 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완벽한 인류 구원의 장치임을 해답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를 동경하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종교 보다 과학 쪽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게 사실이다. 따라서 인류 구원에 과학이 담당할 역할에 대해서 종교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모든 인류의 구원이 예수의 재림으로 다 해결된다고 하는 기독교 특유의 초자연적인 메시야주의를 견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인류의 모든 문제를 과학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의 섭리를 부인하고 과학의 '자동성'과 유일성을 주장한다.

인률의 구원(해방)을 놓고 이토록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는 가까스로 충돌을 극복하고 각자의 역할분담을 인정하면서 대화와 통합의 논의에 까지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가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는 섭리론과 자동성이 완전히 납득되기 전에는 두 진영의 완전한 통합은 쉽지 않을 것 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주장을 다 수용하는 ‘자동섭리론’을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마가복음의 편집 과정을 따라가 보면 준비과정을 마친 예수(1: 1-8)는 갈릴리로 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고 선포한다(1: 15). 그런 다음 제자들을 선발하고(1: 16-20; 2: 13-17; 3: 13-). 귀신을 내어 쫓고(1: 21-28), 병자들을 고치고(!: 29-34; 1:40-45; 2: 1-12;3: 1-6), 율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들어내 보이다가 바리새파 및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한다. 그 결과 바리새파와 헤롯당이 야합하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3: 6). 이 사실을 감지한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다니며 피신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중에 열 두 제자의 선발을 마무리 한다.

그 때 예루살렘에서 거기까지 찾아온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바알세불 귀신이 들려 그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쫗는다고 했다(3: 22). 그 말을 들은 예수는 사탄끼리의 충돌, 국가의 내란, 가정의 불화 등 짤막한 비유들로 귀신을 내어 쫗는 자신이 어떻게 귀신편이겠느냐고 반격한다(3: 23-30). 그 때 마침 예수가 미쳤다는 헛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들을 향해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참 가족임을 밝히면서(3: 31-35)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으로 바꾼다(4: 1-34). 그 결과 상당히 구체적인 세 편의 비유가 제시된다.

우리의 연구 대상인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그 세편의 한 가운데에 있는 두 번째 것 이다. 첫째 비유는 땅을 강조하고 마지막 이야기는 그 나라의 성장을 강조하는 반면 이 비유는 ‘아우토마테’(αυτοματη)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자동 성장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의 ‘자동성’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이 비유의 ‘자동성장론’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에 필수적인 두 주체의 완전한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 섭리론’을 예감하기 때문 이다.

 

 

II. 문헌학적 고찰

 

4: 26 그는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린다. 27 그리고 그가 밤, 낮으로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28 땅은 자동으로 열매를 맺는데,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 속에서 제대로 여문 곡식이다. 29 그러나 열매가 익으면 바로 낫을 댄다. 추수때가 왔기 때문이다.”

4: 26 Και ελεγεν, Οτω? εστιν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 ανθρωπο? βαλ τον σπορον επι τη? γη?

27 και καθευδ και εγειρηται νυκτα και μεραν, και σπορο? βλαστ και μηκυνηται ? ουκ οιδεν αυτο?. 28 αυτοματη γη καρποφορει, πρωτον χορτον ειτα σταχυν ειτα πληρη? σιτον εν τ σταχυ. 29 ταν δε παραδοι καρπο?, ευθυ? αποστελλει το δρηπανον, τι παρεστηκεν

θερισμο?.

본문의 형성에 대한 토론: 마가가 이미 앞에 나온 씨뿌리는 비유(3:3-9)나 뒤에 이어지는 겨자씨비유(4:30-32)와 함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자료를 입수했을가? 아니면 이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만 따로 입수하여 씨에 대한 비유의 문맥 속에 삽입했을가? 이들 질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Guelich, 1989: 238).

이 비유는 마가에만 있다. 마태는 이 비유 대신 ‘가라지 비유’(13:24-30)를 소개한다. 어떤 이는 이 비유가 원래는 이중 비유로 겨자씨 비유에 연결되어 있던 것인데 마태와 누가가 그것을 동류화 법칙에 의해 탈락시켰다고 본다(Streeter, 1927: 171, 190).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기 때문에 바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Bultmann, 1921: 220).

많은 사람들이 마태가 마가의 이 비유를 가라지 비유로 변형시킨 것으로 본다(Guelich, 1989: 244; Schweizer, 1970: 101-102; Johnson, 1960-1977: 94). 그 이유로 쉬바이쳐는 이 비유들의 위치를 상기시킨다. 가라지 비유가 씨부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 사이에 오는데 마가에서는 그 자리가 바로 이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잔슨은 언어학적으로 접근한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사용한 어휘들 중에서 적어도 네 개의 단어가 가라지 비유에 나타난다(Johnson, 1960-1977: 94).

어떤 해석가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의 씨에 대한 비유를 자료로 활용한 다음에 마가가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후에 이 비유를 첨가했다고 주장한다(Baltensweiler, Oikonomia, 69-70). 그러나 이 주장은 복음서의 내적 외적 증거를 전혀 확보할 수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반면에 켈버는 마가가 하나님의 나라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4:11-32)를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4:26-29)와 '겨자씨 비유'(30-32)를 다른 것들과 결합시켰다고 주장한다(Kelber, Kingdom, 29-32).

그러나 켈버의 주장은 이 비유들의 소개공식(και ελεγεν, ‘그는 또 말했다’) 이나 그것들의 서문들 때문에 이것들이 마가의 편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에 직면한다. 이 소개공식 ‘카이 엘레겐’(και ελεγεν, 4: 9, 26, 30; 14: 36; cf. 12: 35, 38)은 마가 이전에 두 비유(4: 26-29, 30-32)를 씨뿌리는 비유(4: 3-8)밑 그것에 대한 해석(4: 14-20)과 결합시키기 위해 사용한 증거가 확실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Gnilka, 1978: 233; Jeremias, 1970: 14; Marxsen, Exeget, 16; Kuhn, Sammlungen, 131). 이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씨의 비유로 설명하기 위한 도입문인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4:11-12)에 대한 말을 보면 그것이 마가의 편집 이전에 속하는 수집물이라고 하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진다(Guelich, 1989: 238).

일부 해석가들은 이 비유에 첨가된 구절들이 있다고 본다. 쿤은 27, 28절을 첨가된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삭제한다(Kuhn, Sammlungen, 104-112). 그의 이런 입장은 모든 비유가 알레고리와는 달리 오직 하나의 비교점만을 가진다고 하는 원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데서 나오는 해석학적인 결과에 근거한다. 그는 농부가 씨의 성장의 비밀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하는 내용과 그와 상반되는 씨의 자율성에 대한 주제(4:27-28a)를 이차적인 것으로 평가하여 제거한다. 그것은 겨자씨비유에서 처럼 파종, 성장, 추수로 이어지는 씨앗의 성장과정만을 언급하는 이야기로 복원하기 위해서 이다. 그결과 26, 28b, 29절만이 보다 초기의 본래적인 형태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크로싼(Crossan, 1973, JBJ, 92: 252)은 4: 28을 제거한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구조나 주제 쪽에서 보면 씨뿌리는 비유 중 ‘돌밭에 뿌려진 씨’(4:5-6)에서 강조하는 성장과 발전에 대한 이차적인 확장으로 볼 수 있고 어휘 쪽에서 보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4:20)의 ‘결실’

(καρποφορειν)에 연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크로싼은 쥘리허(Jlicher, 1899: 545), 케이브(Cave, 1964-65: 384f), 슐(Suhl, 1965: 154-157) 등에 동의하여 29절(심판, 추수)도 비유의 흐름에 모순되는 것으로 본다. 그 증거로 특별하게 지적되는 것은 농부가 씨의 성장을 모른다는 대목(4:27b) 이다. 따라서 농부의 활동은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비유는 28절에서 끝나는게 자연스럽다. 그래서 그들은 29절을 마가의 첨가로 본다.

그러나 이 비유를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29절은 필수적인 요소에 속한다. 이 비유는 교차구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9절을 제거하려는 해석가들의 주장은 반증되어야 한다. 그 구절이 비유의 본래적인 요소에 속한다고 하는 견해가 더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Gnilka, 1978: 234).

불트만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련된 서두를 후대의 첨가로 본다. 이 비유는 원래 ‘사람이... 뿌림과 같으니’(? ανθρωπο? βαλ)를 서두로 하여 전승에서 전해진 것으로 평가된다(Bultmann, 1921: 220).

이 비유를 예수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Gnilka, 1978: 237). 그것이 예수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데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Guelich, 1989: 238). 그 이유는 이 비유가 예수의 말이 지니는 태평스러움 믿 현재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Gnilka, 1978: 237-238). 마가는 이 비유에서 예수가 말한 그대로를 받아들인 것으로 평가된다(Gnilka, 1978: 238). 그가 이 비유를 전승되어 내려오는 자료에서 발견하여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Kelber, 1974: 29-30).

장르: 이 이야기는 씨와 씨의 성장을 사이에 두고 농부와 땅의 역할을 주제로 하여 농촌의 일상적인 경험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 이야기가 모든 비유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한다(Gould, 1983: 79). 시제도 도입공식에서만 단순과거를 쓰고 내용에 들어가서는 현재 시제를 주로 사용하여 일상생활의 반복성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장르는 전형적인 비유에 속한다.(Gnilka, 1978: 234; Guelich, 1989: 238).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대조비유’ 속에 포함시킨다(Jeremias, 1970: 146; Cranfield, 1959: 168). 그러나 ‘대조’라는 말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것 이다. 이 비유의 결론부(29절)에 가면 ‘대조’ 보다는 ‘통합’의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나기 때문 이다.

이 비유를 ‘참고 기다리는 농부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Jeremias, 1970: 146; Johnson, 1960-1977: 94: Cadbury, 1947: 40). 그들은 ‘참고 기다림’의 주제를 예수의 교훈의 특징으로 본다(눅 12:45; 17:22; 18:1-8). 이 비유가 성장과 관련된 기다림을 암시하는 것은 사실일 것 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비유의 핵심 주제는 아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의 ‘자동성장성’에 있다.

본문의 구조: 이 비유는 내용면에서 씨뿌림(4:26b), 성장(4:27b-28), 추수(4:29)의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Dupont, 1967, RSR, 376-388). 그러나 이런 분류는 피상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Guelich, 1989: 239). 비유가 농부와 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농부와 함께 씨뿌림으로 시작하여, 씨가 자라는 동안 그를 떠나고, 추수를 위해 그에게 돌아와서 농부와 씨가 함깨 끝낸다. 이런 구조를 ‘양자택일적 리듬’이라고 부르는 해석가도 있다(Gundry, 1992: 221-222). 어쨋건 이와 같은 주체의 이동은 ‘농부’와 ‘씨’가 다 중요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쪽에서 보면 이 비유는 교차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소개 공식(4:26a)과 비유의 서두(4:26b)로 시작한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서 ‘농부’(4:26c-27a), ‘씨앗’(27b), ‘농부’(27c), ‘땅’(28), 그리고 다시 ‘농부’(4:29)의 순으로 주체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을 편견 없이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농부의 활동(26c)에 씨의 자율성이 반제로 등장한 다음(28) 두 주체가 함께 만나는(29) 변증법적과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연구사: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분량에 비해서 내용이 복잡한 편이다. 따라서 해석의 경향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어떤 해석가들은 농부의 역할을 연구한다(Jeremias, 1970: 146; Johnson, 1960-1977: 94: Cadbury, 1947: 40). 그들의 해석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래 참고 기다리는 농부’에 비유했다고 보는 해석 이다(Jeremias, 1970: 146ff). 둘 째는 그 나라를 ‘의심 많은 농부’에 비유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Baltenweiler, 1967: 69-75). 세 째는 그 나라를 ‘추수꾼’에 비유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Crossan, 1973: 85).

그러나 다른 이들은 씨의 성장을 추적한다(Guelich, 1989: 244). 그들의 해석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Guelich, 1989: 240).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라는 씨앗의 비밀성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고싶어하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그 나라를 추수에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려는 해석이다. 그 외에 다른 해석가들은 농부와 씨에만 집착하지 않고 이야기 자체를 연구한다(Gnilka, 1978: 234f).

크랜필드는 이 비유의 해석 방법들을 두 개의 범주로 정리한다(Cranfield, 1959: 167). 하나는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관찰 이다. 직접적인 해석은 다시 씨를 중심으로 하는 해석, 성장 기간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추수를 대상으로 하는 해석, 씨뿌림과 추수의 대조에 관심을 두고 하는 해석으로 세분화 된다. 그 중에서 크랜필드는 성장 기간에 대한 관심과 씨뿌림과 추수를 대조시키는 연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만(C.S. Mann)은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의 경향을 네 가지로 나누어 정리한다(1986: 269-270). 첫째는 씨를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이나 이해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하는 해석 이다. 둘째는 씨의 성장이 그 나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하는 해석이다. 그것은 이 비유가 느리고,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불가항력적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고 보는 해석 이다. 셋째는 종말론적인 해석이다. 그것은 마지막 때의 추수에 관심을 집중한다. 넷째는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하는 해석 이다. 그것은 이 비유의 임박한 추수에 대한 주제와 예수의 공생애 속에서 현재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그 나라를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비유의 개체 부분들에 대한 관심 보다는 비유 자체의 일관된 내용을 뭇게될 것 이다. 그 다음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상징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 이다.

 

 

III. 농부와 농사법

 

‘그는 또 말했다’(Και ελεγεν)고 하는 소개공식에 의해 시작되는 이 비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 이다. 전형적인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비유는 씨를 사이에 두고 농부와 관련된 사실들과 땅에 관련된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가. 농부의 활동

농부는 ‘어떤 사람’(ανθρωπο?)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가 하는 중요한 일들 중에 하나는 씨를 뿌리는 일 이다. 그러나 해석가들 중에는 이 비유에서 농부가 담당한 씨뿌리는 역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씨의 보조역할 정도로 평가절하 하는 이들이 있다(Guelich, 1989: 245f). 그들은 농부를 보조자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그의 씨뿌리는 동작을 묘사한 동사 ‘발레인’의 의미와 시제를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1. 씨뿌림

그들은 ‘뿌리다’로 번역된 ‘발레인’(βαλειν,)씨를 성의 없이 그냥 던지는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어서 그것이 파종에 대한 정상적인 표현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Baltenweiler, 1967: 72; Lohmeyer, 1963: 86). 농부의 행동을 글자 그대로 땅에 씨를 던졌다고 표현한 것은 씨와 농부를 분리시켜서 씨가 싹이 나는데 농부의 공헌이 전혀 없었음을 명시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 있다(Guelich, 1989: 240).

공관서 기자들이 씨와 관련된 비유들에서 파종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한 동사는 ‘스페이레인’(σπειρειν, 뿌리다) 이다(마가 4:3f, 31; 마태 13: 3, 27, 31). 겨자씨비유에서도 마가와 마태는 ‘스페이레인’을 쓴다. 그러나 누가는 같은 겨자씨비유 안에서 ‘스페이레인’ 대신 ‘발레인’을 썼다(누가 13: 19). 따라서 씨와 관련하여 사용할 때 ‘스페이레인’과 ‘발레인’ 사이에 그렇게 큰 의미의 차이를 두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스페이레인’을 사용한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강조점이 파종에 있지 않고 밭에 있다. 따라서 농부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레인’을 썼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씨앗을 뿌리는 동작을 ‘발레인’으로 묘사한 것이 결코 씨앗이 농부에게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Gnilka, 1978: 235).

‘발레인’의 시제를 가지고 농부의 공헌을 평가절하 하는 해석 가들이 있다(Gulch, 1989: 241). 그들에 의하면 농부의 활동에 가정법 단순과거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씨에 사용된 가정법 현재와 대조시켜 두 주체의 활동의 차이를 반영하기 위한 배려라는 것이다. 씨를 땅에 던지는 농부의 행동은 단 한번으로 끝나고 씨의 활동들은 계속됨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빈도수의 대조를 통해 농부보다 씨가 강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소개 공식에서 예수에게 사용한 '에게인'(λεγειν)도 미완료형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 씨의 활동이 예수의 말보다도 강조되고 있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를 평가절하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다. 물론 ‘씨’가 이 비유에서 제일 가는 주제인 것처럼 생각하게 해 주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는 씨앗 주제가 파종에서 추수까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농부의 역할은 그러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결론부(4:29)의 추수하는 사람이 씨를 뿌린 농부(4:27)와 같다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농부는 씨를 뿌린 후 씨의 성장에 참여하지도 않고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씨뿌리는 농부와 추수하는 이가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씨가 열매를 맺어(4:29a) 추수할 준비가 되어야(4:29c) 농부의 추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셋째 이 비유는 앞뒤로 씨앗비유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이 비유 역시 씨앗비유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Gulch, 1989: 240).

그러나 우리는 씨를 부각시키기 위해 농부를 평가절하 하는 해석은 통찰력이 결여된 편견이라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씨가 아무리 중요해도 농부가 그것을 제대로 된 땅에 뿌려주지 않으면 씨의 생명력이나 땅의 성장시키는 능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씨뿌리는 일은 농부의 절대 권한이다. 농부의 이러한 권한은 이미 ‘씨뿌리는 비유’(막 4:1-9)가 확인시켜주고 있다. 농부는 어느 누구의 충고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씨를 뿌린다. 돌짝받이건, 길바닥이건, 가시덤불이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임과 동시에 권한이기 때문이다.

2. 농부의 기다림

농부에 대한 비난은 27ac의 해석에서도 계속된다. 27a를 보면 농부는 씨를 뿌린 다음 ‘밤, 낮으로 자고 깨고 하면서’(καθευδ και εγειρηται νυκτα και μεραν,) 걱정 없이 지낸다. 그닐카는 농부에 대한 이 묘사 때문에 이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 비유로서는 함양미달이라고 혹평한다. 그래서 마태와 누가가 마가의 이 비유(4:26-29)를 생략한 것 같다고 주(10)를 달고 있다(Gnilka, 1978: 235). 다른 해석가들 중에는 이 말이 씨의 성장으로부터 농부의 활동을 격리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준비된 구절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Guelich, 1989: 241).

그러나 어떤 이들은 농부의 걱정 없는 태도를 마태(6:25ff)나 누가(12:22ff)의 ‘걱정하지 말라’는 권고와 유사한 것이거나 아니면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불안해하지 말라는 권고로 해석한다(Schweizer, 1970: 102). 그래서 나인햄은 농부의 이러한 ‘비 활동성’이 이 비유의 강조점이라고 까지 말한다(Nineham, 1963-1969: 143). 농부는 씨를 뿌린 다음 그 씨가 자라는 동안에 불안한 마음이나 과격한 활동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나인햄에 의하면 이 비유는 열심히 지나쳐 초조해지고 낙심하는 성급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충고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지 열심당과 같은 인간들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예수의 확신의 표현 이다. 비록 예수가 하는 일이 장애물들을 만나고 극적인 결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 씨는 뿌려지고 있으니 제자들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씨의 결실을 추수하는 하나님이 역시 그 나라도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농부가 땅 혹은 하나님에게 씨를 맡기듯이 그 나라의 실현을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그 후속조치로 해야될 일상적인 농사일까지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당연히 해야 될 김매고 비료 주고 보살피는 일들이 생략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 생략된 것은 아니다. 씨가 자라는데 필수적인 햇빛이나 비와 같은 긍정적인 요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러면 해도 안 비치고 비도 오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런 해석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씨의 성장을 위협하는 바람, 우박, 가뭄과 같은 것들도 함께 생략되고 없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밤, 낮으로 자고 깨고 하면서’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농부의 ‘걱정 없음’을 자기가 해야될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상태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의 무관심한 것 같은 태도는 자신이 해야할 임무를 다 하고 난 다음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결실 하는 자연의 법칙을 믿는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농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땅에 파종을 끝낸 다음 나머지 일들은 씨앗과 땅이 하도록 완전히 맞겨두는 일이다(Gnilka, 1978: 235; Moule, 1965: 38). 그것은 씨와 땅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농부의 무지

그러나 농부에 대한 해석가들의 평가절하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씨가 싹이 나고 자라는 내막을 농부가 알지 못한다’는 27c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농부가 ‘알지 못함’을 ‘제자들의 알아듣지 못함’(4:13, ουκ οιδατε την παραβολην ταυτην)이나 ‘들을 귀’(τι? εχει ωτα ακουειν)를 필요로 하는 제자들(4:23)과 일치시키는 알레고리 적인 해석을 한다(Gulch, 1989: 241).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와 농부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제자들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문제다. 그들은 지적 훈련의 부족 때문에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열려 있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그것은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노력부족이나 고정관념 및 시각 차이에서 오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농부의 ‘알지 못함’은 사정이 다르다. 이 말은 농사과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미칠 수 없는 씨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성장능력, 곧 자연법칙을 말한다(Gould, 1983: 80). 그는 알 수 없는 것, 알아서는 안될 것, 몰라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모르는 것은 게으름, 시각, 고정관념 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몰이해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임무나 사명의 문제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농부에게는 본래부터 씨의 활동을 알고 그 활동에 참여할 사명이나 임무가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농부에게 부여된 법칙이 아니고 자연에게 주어진 법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부가 씨의 활동을 알고 개입하려고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그의 본분을 벗어난 월권이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떤 이들은 농부가 씨의 성장의 비결을 모르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Johnson, 1960-1977: 94). 그 나라가 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곡식을 생산하는 것은 씨를 뿌린 자나 씨가 아니고 땅이 듯이 하나님이 그 나라의 경이로운 성장을 창조해 낸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땅이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용납될 수 없다. 땅은 세상(역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씨의 성장의 비밀을 모르는 것은 농부의 게으름 탓도 아니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씨와 땅의 일이요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농부는 농사의 법칙만 알면 된다. 농부의 이런 조건은 27a절에서부터 이미 암시되고 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씨뿌리는 일과 추수다(Lane, 1974: 169). 자연법칙은 그의 소관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간섭하고 침해해서는 안된다.

다른 해석가들 중에는 양보론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씨의 성장에 대해서 더 이상 ‘알지 못함’은 씨에 대한 비유를 말하는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Sundry, 1992: 219). 그러나 그것은 농부의 양보가 아니다. 그는 단지 그것이 자기가 알아야 할 농사법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월권행위를 하지 않는 것뿐이다.

 

나. 농부의 상징성

농부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 전통들이 있다. 첫째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 해석이다(Harder, 1948-49).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데 29절에서 농부가 심판자를 의미하는 ‘추수꾼’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를 예수로 보는 해석이다(Marcus, 1986: 177-185; Lane, 1974: 169; Mssner, 1955). 하나님 외에 ‘심판’은 ‘사람의 아들’(계 14:15)과 같이 하나님이 지정한 대리인의 권한이기 때문이다(8:38). 그러나 농부를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에는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Gnilka, 1978: 233). 비유 속에서 농부가 씨의 발아와 성장의 내막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4:27).

세 번째는 농부를 ‘사람의 아들’로 보는 해석이다(Stuhlmacher, 1973: 365-403). 26절에서 그가 ‘사람’(ανθρωπο?)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거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Gnilka, 1978: 235; Gundry, 1992: 219). 거기서 ‘사람’은 불 특정인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농부가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Johnson, 1960-1977: 94). 우리는 이 해석에 귀를 기우려 볼만하다고 여겨진다. 바울도 자신을 ‘씨를 뿌리는 사람’(εγω εφυτευσα)으로 소개하고 있다(고전 3:6). 제자들과 바울은 교회로 이어진다. 따라서 농부는 교회(종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상징하는 농부의 첫 번째 과제는 씨를 뿌리는 일 이다. 씨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근본적인 종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창 22:18). 약속의 내용은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질 복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그 나라의 '말씀'이라고 한다(Marcus, 1986: 177-185). 따라서 씨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복된 말씀이다. ‘씨뿌림’은 이 복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Lane, 1974: 169). 교회는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 선포해야 한다.

농부는 씨를 뿌린 다음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어나는 한가해 보이는 생활’을 한다. 농부가 예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쪽에서는 농부의 한가한 생활에 대한 표현이 초연 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예수나(4:35-41 비교) 그 후 마가의 독자시대의 교회가 비판적이고 과격한 사건들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초연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Marcus, 1986: 177-185). 그러나 어떤 이는 ‘초연선’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자고 일어나는 일’은 단순히 시간 경과를 알리는 정상적인 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Guelich, 1989: 243).

농부의 손을 떠난 씨는 그 때부터 자연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농부는 조용히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이와 같이 교회도 말씀을 선포한 다음에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로 결실할 것을 믿고 기다릴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씨의 성장에 대한 ‘농부의 무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농부를 예수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에서는 ‘농부의 무지’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수의 이해부족(5:30; 6:6; 13:32)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다(Marcus, 1986: 177-185).

그러나 마커스는 예수의 이해부족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증거도 예수가 그 나라의 본성과 작용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거의 입증하지 못한다(Guelich, 1989: 243).

농부의 무지는 씨의 성장이 자기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농부가 알지 못하지만 씨가 싹이 나서 자라는 것처럼 제자들과 교회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게 싹이 나서 자라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싹이 나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 할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이해하겠느냐?’고 한탄하실 것이다. 그 다음 다른 하나는 교회가 씨의 일을 알려고 한다거나 간섭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IV. 씨와 땅의 자연법칙

 

가. 씨의 자동성

28절에 들어서면서 이야기의 흐름에 큰 반전현상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주체가 농부에게서 땅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씨는 농부의 영향권을 벗어나 땅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농부에 의해 뿌려진 씨가 땅에 의해 ‘자동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땅의 ‘자동생산 능력’이 전면으로 나와서 활약한다.

1. 아우토마테(αυτοματη)

반전의 과정에서 사용된 결정적인 단어 ‘아우토마테’(αυτοματη)는 형용사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의 부사 적으로 쓰이고 있다. 크랜필드(Cranfield, 1959: 168)에 의하면 이 단어가 고전 헬라어에서는 자주 쓰인 것으로 보고된다. 크랜필드에 의하면 칠십인역은 이 단어를 여섯 번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문서 중에서는 이 구절 외에 사도행전(12: 10)에서 한번 더 나타나는 정도다. 거기에서는 이 단어가 부사 적으로 문이 열리는 동작을 수식하고 있다. 헬라문화권에 비해 히브리 문화권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아우토마테’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자동으로’는 “씨 안에 들어 있는 신비스러운 생명력”(Moule, 1965: 38)의 자동적인 성장능력을 강조한다. 씨의 생명력은 땅을 만나야지 농부에 의해서는 절대로 발휘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이 비유는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러한 ‘땅의 자동 생산성’(28a)을 강조하기 위하여 미리 ‘농부의 알지 못함’(4:27c)을 부각시켰다고 보기도 한다(Guelich, 1989: 239). 따라서 씨의 ‘자동 성장 능력’과 땅의 ‘자동생산 능력’은 이 비유의 최고 강조점 중의 하나임이 분명한 것 같다.

'자동으로'가 직접적인 문맥상으로는 '농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Gundry, 1992: 220-221).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그 어느 힘의 조력이나 간섭 없이 ‘자율에 의해서’, ‘자연법칙에 의해서’ 라는 뜻으로 해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해석 가들은 ‘자동으로’를 신앙 고백적으로 확대해석 하여 ‘하나님에 의해서’와 동의어로 보려고 한다(Ernst, 1981: 142; Peach, 1977: 256; Grundmann, 1977: 131). 그들은 ‘아우토마테’(αυτοματη)를 그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일반적인 인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인식이란 씨가 싹이 트는 것을 인간의 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활동으로 보던 당대의 고정관념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해석 가들은 ‘아우토마테’를 아예 ‘인간의 노력 없이’와 같은 표현으로 보려고 한다(Guelich, 1989: 242: Lane, 1974: 169; Cranfield, 1959: 167). 그들은 문맥상으로 볼 때 ‘자동으로’라는 말이 ‘인간의 노력 없이’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4장 28a절의 문맥 자체도 농부의 노력이나 이해와 무관한 씨의 성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 가들도 씨의 자람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역할을 부각시켜 하나님이 인간의 노력 없이 자신의 나라를 이룩한다고 하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자동으로’라고 하는 말을 썼다고 해석한다(Marcus, 1986: 172-173; Ernst, 1981: 142; Grundmann, 1977: 131; Pesch, 1977: 256; Cranfield, 1963: 167).

그러나 쉬툴만은 '자동으로'가 식물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사람의 노력 없이'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하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uhlmann, 1972-73: 154-156). 반면에 클라우크는 쉬툴만이 ‘자동으로’(αυτοματη)에 대한 성서와 외경의 자료를 공정하게 입증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Klauck, 1981: 221). 클라우크에 의하면 성서나 외경에 신적인 기적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타난다(행 12:10; 여호수아 6:15-18). 그러나 저들 신적인 기적들이 식물의 성장에는 연결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위기 25장 5절은 안식년에도 제 멋대로 자라는 씨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경우에 씨의 성장이 사람의 활동과 무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이 저절로 자라는 씨의 활동에 신적인 활동이 전혀 미치지 못함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겔리치도 이 구절을 세밀하게 검토하면 ‘아우토마테’가 ‘하나님에 의해서’와 동의어라고 볼만한 증거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Guelich, 1989: 241). 사실 ‘자동으로’가 ‘하나님에 의해서’란 말과 동의어라면, 그래서 씨의 발아와 성장이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사실이 누구나 아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면 예수의 비유가 왜 새로운가? 둘 째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예수의 비유가 외부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로 들리는 제자들만을 위한 비밀인가(마가 4:11). 세 째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을 왜 제자들만 모르고 스승을 한탄하게 만들었을 가(마가 4: 13).

어떤 해석 가는 ‘자동으로’를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열심당의 시도를 비판하기 위한 말로 해석하기도 했다(Bugge, 1903: 157ff). 예레미아는 여기서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열심당 출신 시몬이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Jeremias, 1947: 147).

쉬바이쳐(Schweizer, 1970: 103)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당대의 젤롯당들처럼 무력을 사용하는 혁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묵시주의자들처럼 정확한 계산과 준비에 의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에 의해서 그 나라가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를 기다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동으로’는 어떤 형태의 의심이나 관심의 반대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 가지고도 안되지만 그것을 아무리 비판하고 의심해도 때가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자동으로’ 이룩된다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그닐카는 ‘아우토마테’를 재림 지연과 연결시키는 해석을 비판한다(Gnilka, 1978: 236). ‘자동으로’를 재림 때 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교회 공동체의 운명을 두고 표현한 용어로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파종과 추수 사이에 씨앗의 운명이 씨앗 자신에게 맡겨지듯 예수의 첫 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버려진 교회도 스스로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 운명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닐카는 재림 지연이 ‘자동으로’의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보는 한 이 비유를 예수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바로 지적한다.

예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행동인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예수는 왜 이방인들의 억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교훈을 주지 않는지 항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레미아는 이 비유가 좌절하는 항의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대조비유라고 한다(Jeremias, 1947: 147).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으니 농부처럼 참고 기다리면 그 나라가 뿌려진 씨의 자율적인 성장과 결실로 나타난다는 것이 비유의 메씨지라는 것이다.

결국 '자동으로'가 좁게는 '농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그 어느 힘의 조력이나 간섭 없이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서 ‘자율적으로’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2. 땅의 능력

씨앗의 ‘자율성장’은 땅의 자동성 때문이다. 씨앗들이 자동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이기 때문이다(Williams, 1983: 97; Gnilka, 1978: 235). 땅은 식물이 자양분을 섭취하여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스스로 제공할 수 있다(Gould, 1983: 80).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마가 4:1-9)에서는 제대로 된 땅을 만나지 못한 씨들은 자율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니고 있던 생명력까지 파괴당한다. 따라서 '자동으로'는 씨와 땅이 공유하고 있는 ‘자연법칙에 의해서’라는 뜻이 될 것이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중의 하나는 이들 씨와 땅(세상)의 자동적인 상호작용을 인정하는 일이다(Gould, 1983: 80).

3. 씨의 성장

27b에서부터 씨의 성장이 소개되고 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이삭이 되어 곡식으로 여물게 된다는 내용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진 상태에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성장한다고 하는 뜻이라고 해석한다(Williamson, 1983: 97f). 반면에 이 비유가 말하는 성장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안에서 인간의 노력에 힘입어서 자연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19세기 낙관론 적인 인도주의에 걸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남긴 허탈감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씨와 땅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자연법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어떤 힘도 그들의 ‘자동성’을 저지할 수 없다. 이 비유는 이와 같은 자연법칙과 그것의 ‘자동성’을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비교하고 있다.

 

나. 자동으로 자라는 씨와 하나님의 나라

어떤 이는 ‘자동으로’를 ‘인위적’이란 말의 반의어로 해석한다(Guelich, 1989: 245). 하나님의 나라는 씨처럼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 한다고 하는 사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씨의 ‘자동성’은 땅을 조건으로 한다. 땅을 만나지 못하는 씨는 성장하지 못한다(마가 4: 2-9). 땅이 씨로 하여금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씨가 농부(교회)의 손안에 머물러 있으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우리는 여기서 땅의 상징성을 먼저 물어야 한다. 포괄적으로 땅은 초월의 반대인 내재, 자연을 상징한다. 그럴 경우 땅의 자율은 초월적인 힘에 종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역사 안에서 교회 밖의 세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 밖의 세계가 씨(복음)를 자동으로 자라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럴 경우 ‘자동으로’는 ‘교회(종교)에 종속되지 않고’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 동안 교회의 학문인 신학과 세계의 학문인 과학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계속되어 왔다. 우리는 그것을 네 단계로 나누어서 정리할 수 있다(Barbour, 1997: 77-105). 첫째는 충돌의 시기다. 그것은 신학이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던 시대다. 둘째는 독립의 시기다. 그것은 신학이 과학의 독립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시대다. 셋째는 대화의 시기다. 두 학문이 대화를 시작한 시대다. 넷째는 통합의 시대다. 두 학문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시대다.

우리는 신학과 과학의 통합 논리를 ‘자동성’의 상징성에서 확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과학의 자동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성장할 복음을 씨앗으로 뿌리는 것은 신학(교회)의 임무다. 그러나 그 복음의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하나님의 나라로 결실 하게 하는 것은 과학(세계)이다. 따라서 신학(종교)은 과학의 ‘자동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연계에게 주신 ‘자율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V. 농사법과 자연법칙의 조화

 

가. 추수활동

29절에 가면 이야기는 다시 변화를 일으킨다. 대조를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δε)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반전을 암시한다. 그것은 씨의 활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던 농부의 역할이 다시 필요한 추수 때가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Gnilka, 1978: 235). 농부는 추수꾼으로 다시 주동사의 주어가 되어 비유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러나 많은 해석가들은 새로 등장하는 농부를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동안 그가 씨의 활동을 알지도 못하고 개입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성장에 공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Guelich, 1989: 243; Crossan, 1973: 253). 다른 하나는 그가 추수꾼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해석가들이 추수를 심판으로 해석한다. 추수를 마지막 심판으로 보는 것은 유대주의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일반화된 은유이기 때문이다. 추수가 심판으로 해석되면 추수꾼으로 등장한 농부는 자연히 심판자가 된다(Gnilka, 1978: 234).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으로 이해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29절 가운데 ‘낫을 댄다’는 말을 요엘서 3장 13절의 반영으로 해석한다. '낫'이 심판에 쓰이는 도구로 상징되는 경우는 요한계시록(14:17-20)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그 ‘낫’을 하나님 대신 천사가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29절을 요엘 서에 빗대는 것은 추수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다(Pesch, 1977: 258; Schweizer, 1970: 102).

그러나 일부 해석가들은 29절 자체를 비유의 비 본래적인 요소로 규정하고 그것을 요엘서 3장 13절의 차용으로 본다(Crossan, 1973: 253). 따라서 그들은 비유가 28절로 끝나야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해석가들도 요엘서 인용을 보다 후기의 첨가로 돌린다(Pesch, 1977: 257; Crossan, 1973: 253; Suhl, 1965: 154-157; Gnilka, 1978: 234). 그러나 우리가 크로싼 및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29절을 요엘서의 차용으로 돌리고 그것을 후기의 첨가로 돌리면 그 비유는 단순히 파종에서 결실에 이르는 씨의 성장에 초점을 마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29절의 생략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럴 경우 복잡하게 주체들을 교체해 가면서 정교하게 전개한 이 비유의 구조와 의미를 간과하게 된다(Guelich, 1989: 244). 씨의 성장과 결실의 문맥(4: 28b, 29a) 안에서는 분명하게 추수가 씨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종은 추수를 전제로 한다. 파종으로 시작한 비유가 추수로 끝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요엘서와 관련된 다른 해석도 나온다. 그것은 요엘서의 반영이 후기에 첨가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언어학적으로 볼 때 그것이 전승과정에서 상당히 일찍 부가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해석이다(Guelich, 1989: 242f).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 자신이 비유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성서적인 내용 조회를 했을 가능성을 부인할 강력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본문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은 심정에서 나오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요엘서(3:13)와는 대조적으로 이 비유에서는 추수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Gnilka, 1978: 235f). 요엘서에서는 추수가 야웨의 날의 마지막 심판 때에 판가름날 죄와 벌을 상징한다(Williamson, 1983: 97).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추수가 기쁨이요 보람이다(Gnilka, 1978: 236). 따라서 29절을 요엘서의 차용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곡식이 익으면 낫과 같은 연장으로 베어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요엘서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농경문화 속에서 인류가 경험으로 터득한 추수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동, 서를 막론하고 익은 곡식을 낫으로 추수하지 않는 농사꾼이 어디 있는가? 그들이 모두 낫질하는 방법을 요엘서에서 배웠다고 볼 것인가? 성서 이전부터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일상적인 사실들 까지도 기어코 성서에서 그 전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성서주의가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요엘서를 읽지 않았더라도 그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까지 그렇게 프루프텍스트에 매달리는 성서주의자로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추수를 아무리 심판 쪽으로 땡겨서 해석을 한다고 해도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이분법적인 판결의 개념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주체가 자율적으로 성취한 결과를 놓고 잘되고 못된 것을 가리는 평가개념에 가깝다. 따라서 그것은 적이나 원수에게 내리는 보복적인 심판과는 다르다. 29절에서 말하는 추수는 알곡을 곡간에 들이기 위한 긍정적인 선별작업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에 쭉정이를 가려내는 부정적인 작업은 부수적인 주변활동 이다.

그런 면에서 악마의 세력을 분쇄하는게 주목적이고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오는 유대주의나 묵시문학적 심판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추수꾼에 대한 표현은 문맥은 다르지만 마태(9:37f)와 누가(누가 10:2)에서도 발견된다. 내용을 보면 두 복음서의 경우 모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는 한탄이다. 여기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추수꾼들은 씨의 성장에 관여하기는커녕 파종과도 무관한 사람들이다. 씨의 성장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추수를 못한다는 것은 성서적일 수도 없고 농사의 관례에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어떤 해석가는 농부의 역할 이동을 그 비유 자체 안에서 역할 교체의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Guelich, 1989: 244). 그에 의하면 그 필요성이란 농부를 씨의 자립적인 성장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용 박(foil)으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씨의 결실을 위해 추수하는 일꾼으로서 그 씨를 정상에 오르게 하는 보조역할 이다. 따라서 농부를 ‘제자’나 ‘하나님’이나 예수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역할 이동에 의해 묵살된다. 그러나 농부는 결코 씨의 보조자가 아니다. 그는 씨를 뿌린 장본인으로 씨의 성장과 결실의 원인제공자다. 그의 씨뿌림 없이는 씨의 성장도 결실도 추수도 없다. 그는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기 위해 추수꾼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자동으로 알곡을 결실해 놓은 씨의 활동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그는 씨와 함께 공동 주체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Taylor, 1966: 286). 그것은 씨와 농부의 완전한 결합이요 농사법과 자연법칙의 완전한 조화다.

 

나. 추수의 상징성

29절은 추수를 말한다. 어떤 이는 이 추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Jeremias, 1947: 146f). 오랜 기다림 후에 농부에게 추수 때가 오듯이 기한이 차면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과 나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해석 가는 추수를 그 나라의 한 과정으로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Lane, 1974: 169). 우리는 추수를 그 나라 자체의 상징보다는 한 과정으로 보는 해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추수를 심판으로 보는 해석에서는 낫에 대한 언급 속에 심판주제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Ernst, 1981: 142). 낫을 부정적인 상징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부정적인 심판이 된다(계 14: 17-20; 요엘 3:13). 심판의 대상은 원수요 적이다. 그러나 추수는 긍정적인 평가 개념이다. 씨와 땅이 ‘자동성’을 전제로 하여 부여받은 자연법칙에 의해 이룩해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추수다. 그 평가의 임무는 농부로 상징된 교회의 몫이다. 그것은 곧 신학(교회)의 윤리적 기능이다.

 

 

VI. 맺는 말: 자율적 섭리

 

마가복음 속의 예수는 1장 15절에서 선포한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세 편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 비유들은 공통성과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공통성은 씨와 땅과 농부다. 특수성을 살펴보면 첫 번째 씨뿌리는 비유(4:1-9)에서는 땅의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된다. 두 번째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4:26-29)에서는 그 나라의 ‘자동성’이 특별히 강조된다. 마지막 겨자씨비유(4:30-32)에서는 그 나라의 ‘성장’이 특별히 강조된다.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는 농부와 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복잡하게 짜여져 있다. 비유는 먼저 농부로 상징된 교회(신학)의 활동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곧 농부를 떠나 씨의 활동으로 이동한다. 그 동안 농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시간만 보낸다. 여기서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농부의 ‘자고 깸’은 하나님의 나라의 건국을 선포한 교회의 확신과 인내에 대한 요청의 상징이다. ‘농부의 무지’는 씨의 자동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교회 밖의 학문(과학)이 신학(교회)의 임무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28절에 이르러 이야기는 갑자기 반전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활동 주체가 농부에게서 씨와 땅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것은 과학활동에 대한 교회의 당혹 감과 충돌을 실감하게 해 준다. 활동을 시작한 씨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복음을 상징한다. ‘씨뿌림’은 복음선포를 의미한다. ‘싹이 남’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한다. 씨의 ‘자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을 상징한다. 씨의 ‘자동성’은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밖의 자연 속에서 자동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강조하는 상징적 언어다. 씨의 ‘자동성’을 보장하는 땅은 교회 밖의 세상(역사)을 상징한다. 그럴 경우 ‘자동으로’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교회(종교)에 종속되지 않고’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

이야기는 다시 변화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전이 아니고 종합이다. 자연 쪽에서는 교회가 뿌려준 씨를 자동으로 성장시켜 이룩한 결실을 가지고 나온다. 신학(농부)은 윤리적인 잣대(추수)를 가지고 등장한다. 그것은 자연이 자동적으로 이룩한 결과 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데 적합한지를 판가름하는 자리다. 동시에 그것은 교회와 과학이 하나가 되어 각자 받은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도록 계획된 하나님의 자동섭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종교)의 패권주의를 경계한다. 동시에 우리는 과학의 유일 주의에게도 경고한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종교와 과학의 완전한 통합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자가 서로 상대방의 기능을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이다. 종교도 과학도 하나님이 주신 자율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율적 활동을 통해 섭리하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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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tenweiler, H. 1967. Der Gleichnis von der selbstwachsenden Saat(Mk 4,26-29) 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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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lsgeschichte als Thema der Theologie. FS O. Cullmann. ed. F.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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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Alexander. 1908-09. The Ears of Corn. Expository Times 20, 377-378.

Bugge, C.A. 1903. Die Hauptparabeln Jesu I. Giessen.

Bultmann, R. 1921.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허혁 역. 공관복음서 전승 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8.

Burbridge, A.T. 1928-29. The Seed Growing Secretly. Expository Times 40, 139-140.

Cadbury, H.J. 1947. Jesus: What Manner of Man. New York: Macmillan Co.

Cave, C.H. 1964-65. The Parables and the Scriptures. NTS 11, 374-387.

Cranfield, C.E.B. 1959.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rk. CGTC.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rossan, J.D. 1973. The Seed Parables of Jesus. JBL 92, 24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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