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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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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영 박사(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대구도시가스 사장)

엘리 비젤(Elie Wiesel)은 시게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1944년 세계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나이 열다섯 살 때 그 마을에도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잡혀갔습니다. 엘리 비젤은 거기에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산채로 소각로에 던지어져 불에 타는 것을 용광로의 불꽃과 굴뚝의 검은 연기 속으로 보았습니다.

그곳의 유대인들 중 얼마는 그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부나 수용소로 옮겨갔고, 거기에서 다시 글라이비츠 수용소로, 또 북헨발트 수용소로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한 화물칸에 수용됐던 1백 명의 유대인이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으로 아흔 명이나 죽었습니다. 다행이 그와 그의 아버지는 생존자에 속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기력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나치 독일의 친위대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버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화장장에 처넣었습니다. 그때 엘리 비젤의 나이는 열여섯이었습니다, 그해 4월 그는 북헨발트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작가가 된 그는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1956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뉴욕의 유대교 신학교에서 유대교 신학을 공부하고 뉴욕의 히브리 유니온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1968년에는 인권 운동가로서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72년 이후 뉴욕 시티 칼리지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회고록 ‘밤(the night)’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글입니다. 아우슈비츠와 비르켄아우의 화장장과 화장터에서 매일 같이 수천수만의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건장한 유대인들은 화부로 뽑혀 살아있는 연약한 유대인을 자기 손으로 화덕에 집어넣어야만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화덕에 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죽이고 죽어가는 장면이 이제는 예사로워 감정마저 마비된 줄 알았던 어느 날 부나 수용소 안에는 두 남자와 한 어린 아이의 교수형 집행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장면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 사람은 의자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의 목은 똑같은 순간에 올가미에 끼워졌다. “자유 만세!” 어른 두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말이 없었다. 수용소 소장의 신호가 있자, 세 의자가 쓰러졌다. 수용소 전역에 정적이 꽉 끼쳤다. 지평선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두 어른은 이미 죽어 있었지만 아이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몸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아이는 반시간 이상이나 거기에 그대로 방치되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버둥거렸고 우리의 눈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나는 나의 내면에서 그에게 대답하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 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도 하나님은 보지 않으시려 대낮을 밤처럼 어둡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거쳐 영광의 부활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만 놀라운 그분의 뜻을 알기에는 우리 인간은 너무 미련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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