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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짐승의 일에 참예하고, 짐승이 받을 진노를 받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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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 집사 (궁극교회)

짐승의 일에 참예하고, 짐승이 받을 진노를 받겠느냐? / 계17:1-5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성질도 그렇고, 인격도 그렇고, 소원 목적도 그렇고 자신의 성품과 인격이 하늘의 신령성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요소로는 되지 않고 오로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그 감화대로 살아야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산다는 것은 분별력 구별력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는 말인데 이를 위해서는 내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은 표면, 껍데기입니다. 성령의 눈을 가지고 보는 눈은 구별력 분별력 가진 눈이니 사람이 활동을 할 때 ‘그 배후에 어떤 영으로 움직이느냐, 무슨 힘으로 움직이느냐’를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모든 운동들의 배후를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건지, 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건지를 볼 줄 알게 됩니다.

17장부터 음녀가 나오는데 교회(성도)의 신랑은 주님이신데 이 교회는 어떤 상황이라도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러지를 않고 소원 목적적으로 세상을 주님보다 더 돋보고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면 성경은 그것을 음녀라고 합니다. 즉 음녀란 타락된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런 자는 세상을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에서의 메시지 중심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면 그 교회 전체가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가 나오는데 이 용어 속엔 백성들과 무리들과 열국과 방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수 많은 일반인들과 세속화된 기독자들이 이 물 위에 앉은 것입니다. 즉 세상이라고 하는 사상 정신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일반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은 자유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눈으로 봤을 땐 모든 사람은 죄의 속박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아무리 일반적인 선행을 해도 실은 다 죄 안에서 하는 것일 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든 사상이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타락 이후로 그 타락성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넣어준 본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먹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 때도 많은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의인 노아도 그 때 아들들을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과, 노아의 아들들이 장가를 가는 것과 뭐가 다른 것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목적적으로 갔고, 노아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지을 목적으로 장가를 갔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목적으로 살면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놓일 사람이라, 불에 타질 사람이라, 음녀라!

세상 사상, 타락된 사상, 땅에서 올라온 짐승(음녀)의 정신으로 예수를 믿으면 그는 세상사상을 가진 것이니 그런 자가 종교활동을 하게 되면 이는 속화된 사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상과 합쳐져서 돈을 많이 끌어 모아 종교적인 큰 사업이나 큰 예배당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하실에서 교회를 하는 분이나, 2층에 세를 얻어 교회를 하는 분이나 ‘어쨌든 키우자’ 입니다. 더 키우기 위해 이쪽 조직과 저쪽 조직이 또 손을 잡습니다. 키우자는 데는 교파 교단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수님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참 교회는 오로지 예수님의 진리로만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인 큰 사업이나 큰 예배당을 건설한 사상을 분해해 보면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그런 큰일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큰 백성이요 무리요 열국이요 방언이라고 했습니다. 실은 이것은 다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더욱 커진 것이 큰 성 바벨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만 지어주면 좋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속화된 교인들은 누가 돈을 투자했건 눈에 보이는 예배당만 지어주면 좋다고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큰 성 바벨론 안에는 더러운 귀신과 각종 더러운 영과 각종 가증한 새들이 모입니다. 여기서의 큰 성 바벨론을 예배당이라고 본다면 큰 예배당 속에 실지로 각종 가증한 새들이 날아듭니까? 그러나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날아들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 보여주는가 하니 하늘로부터 내려온 큰 권세를 가진 영광의 천사가 땅을 환하게 비취면서 밝혀내고 있습니다.(계18:1)

큰 성 바벨론(예배당) 안에서 더럽고 가증한 것들이 순진한 성도들을 꾀어 성도들의 피와 노력과 땀을 착취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헤롯왕이 유대인들이 피땀 흘려 모든 재물을 세금으로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친 그 물질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이방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을 탄압하고 죽이는데 쓰였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피와 땀을 착취해 세상으로 허비하게 만드는 자가 다른 곳이 아닌 바벨론(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없는 속화된 교회에서는 아무리 물질을 바치고 충성봉사를 해도 자신에게 영직인 소득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본문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믿는 교회요, 사람이요,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은 본능적으로만 삽니다. 창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선악 먹은 이후로 하나님을 버리고, 영원을 버리고, 창조목적을 버리고 현실위주 현실목적으로만 사는 자를 짐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불탈 것만 소원 목적하고 사는 인간을 짐승 같다고 합니다.(다니엘, 유다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 배만 위하는 사람, 게으름뱅이,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 용이나 뱀이나, 구약의 바벨론 왕이나,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는 자, 본능으로 하나님 말씀을 훼방하는 자, 육체를 따라 각종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들, 그리고 다니엘 7장에도 나라를 짐승으로 비유를 합니다.(표범 곰 수양 등이 나라들이요, 곧 사람들이니 왕들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한 것은 선악과를 먹는 사람의 총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 안팎에서 짐승들이 활동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동족이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곧 짐승 같은 사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랬고, 버가모 교회에서는 안디바가 같이 믿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했고, 제사장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요아스 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게 다 교회 안에서 짐승들에 의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나온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볼 때 목사가 예수이름으로 세상부자가 되라고 가르치면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다 죽습니다. 그 메시지의 성질이 본능성이요 짐승의 성질입니다. 그 성질에 의해 하나님 백성의 신앙 믿음 성장 면이 다 죽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한 사람이건, 조직이건, 단체건, 나라건 짐승노릇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간 자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이 살아가는지, 살아가는 것으로 성장하는지, 아니면 죽어가는지를 느껴라! 이걸 느끼는 사람은 성령의 감화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구원은 주님이 책임졌으니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성질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과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주님께서 바리새교파와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의 속에 든 것을 지적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외식운동하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거나 화를 선언하지 않았거나 심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속절없이 속고 말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이 받은 심판을 다 받고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껍데기 운동입니다. 외식운동, 껍데기 운동은 심판입니다. 성경은 알맹이 운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과 성품이 만들어져 나가는 운동이 알맹이 운동입니다. 이렇게 됐을 때 마지막 날 최고의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의 것을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교인들이 성경을 몸에 걸치고 외우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예수가 오니 죽여 버렸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하나님 자녀요 백성이요 교인이면서 자기에게 오는 진리이치를 말살시키고 있다면 그 당시의 그들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령의 감화성을 죽이고 있다면 그가 어찌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짐승을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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