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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꽃잔치 속에서 황무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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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태화 (안양대 교수-기독교문화학)

4월에는 꽃이 활짝 핀다. 제주도부터 시작된 꽃맞이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서히 올라온다. 우리의 마음을 온갖 화려한 색감으로 물들이며 조국 강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창하고 유쾌한 4월에 ‘초치는’ 시구가 하나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 때문이다. 황무지를 노래한 시인 T S 엘리엇 때문이다.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장시 ‘황무지’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4월의 기억을 그렇게 채색하려 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이토록 현란하게 물들여 오는 문명의 봄철에 어쩌자고 시인은 잔인성을 읊조리고 있는가. 마치 모두가 유쾌하게 파티라도 벌이고 있는 잔치마당에 장송곡을 불러대는 심보라고나 할까. 아니면 그런 단조의 음율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화련한 꽃잔치 속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무지를 노래하는 시인의 눈에 과연 무엇이 보였던 것일까.

하지만 시인은 옳았다. 시인이 바라보는 대지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 웅장하였지만 실상은 회칠한 무덤 같았다. 시인은 꿈틀거리는 저 인간 군상들의 욕망,그 이면에 회색빛으로 신음하며 창백하게 누워 있는 문명의 속내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적 시인에게만 허용된 비밀의 이미지였다.

그랬다. 그때에는 메뚜기떼가 창궐했다. 그때에는 황충이 우글거렸다. 그때에는 외적의 창과 칼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 하나님께서 교만한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이기도 했다. 전쟁과 살인,음란과 부정의 광기를 멈추지 않는 백성을 향한 최후의 손길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무엇이 메뚜기를,황충을,창과 칼을 대신하게 될 것인가. 그것은 어쩌면 돈에 대한 눈먼 욕망일지도 모른다. 포르노를 향해 던지는 음흉한 눈길일지도 모른다. 다빈치 코드 같은 거짓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각박하다고 한탄하는 바로 그 세상을 시인은 황무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황무지는 하나님의 시험대일 수 있다. 돌아오라는 경고였던 것이다.

4월을 잔인하다고 한 시인의 예언은 그래서 타당성을 얻는다. 화려한 꽃잔치를 즐거워하라. 봄이 선사하는 생명의 환호를 온몸으로 만끽하라. 하지만 우리가 가공할 욕망을 지닌 유한한 인간임을 이 계절에도 잊지 말라. 이 역설의 진리를 잊지 말라.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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