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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와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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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오늘의 지식인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상당한 지식의 폭과 깊이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쁜 생활에서도 많은 사색을 가져야 하고 독서로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야 한다. 그런데 맹목적인 사고력과 자의적인 독단에 빠져 판단의 균형을 잃고 있는 지식인의 자화상을 보면 지식인은 편의적인 이론을 좋아하며 그 이론은 확고한 이론위에 선 이론이 아니고 얄팍한 지식위에 자기논리를 구사하려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을 어떤 뜻있는 분은 속성재배(速成栽培)식 교육풍토에 그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 한다. 이러한 이유들 중에서 현대문화가 고전(古典)의 문화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등한시한 실수로 보는 경향에 주목하는 것이다.

  독서는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 독서생활로 독서자체의 검토와 반성이 우리의 생활에서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력과 시간의 낭비에 비하여 소득이 적다는 핑계로 독서에 등한이 한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사람이 한 삶을 살아가려면 스스로 체험하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유한한 시간동안 각양각종의 유형의 인간생활을 전부를 체험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의 소설들을 통하여 삶의 여러 형태를 살아가는 삶의 철학을 공부하는데 유익한 것은 독서이다. 한목숨 한번 부지한 일회용 한평생은 이런 저런 사람이 되어 볼 수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생활은 그것을 기록하고 표현하여 놓은 소설을 많이 읽음으로써 인생의 복잡다단한 기미(機微)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독서에서 얻는 이득인가 생각해 본다. 근대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많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옛날부터 아마 4,5천 년 전부터 서적이 나와 쌓이고 하여 오늘에 와서는 그 수효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리하여 대학의 웬만한 도서관이라면 수백만 권의 책을 저장하여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많은 서적 중에서 우선 어떤 것을 선택하여 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임을 알게 된다.

  자기의 전문 분야의 전공, 수양을 위한 교양, 취미, 생활의 편의를 위한 안내, 인생론, 메스 미디어에 따른 문화 컨텐츠에 따른 서적 등 여러 종류의 산재한 서적들을 두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의 계승과 번영을 위하여서는 우선 지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육신의 의식주 생활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불가결한 필수요건이지만 사람에게는 그것 못지않게 정신생활의 신장(伸張)을 욕구한다. 이 정신생활의 고도화를 실현하려면 각 개인의 인격 수양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격이나 덕행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은 이익이나 행복을 가져오는 것보다 악과 불행을 지어 내기 쉬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이다. 우리가 사람인 까닭에 도리어 사람 자신에 관한 일을 너무도 모르고 또 그것에 무관심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으로서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만족도 못하고 자기 생활도 만족도 못하여 불행한 나날을 살기 마련이다. 인생론이나 행복론이나 하는 고전의 서적들이 대단히 많아서 이루 다 독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인생을 잘 알려면 스스로 체험하여 보는 것이 좋지만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각양각종의 유형의 인간생활을 전부 체험할 수가 없다는 말을 거듭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한번 밖에 살수 없는 일생(一生)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생활은 그것을 기록하고 표현한 소설을 많이 읽음으로 세상만사의 기미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을 이해하고 근본을 깨닫는다면 독서의 이득을 찾아야 하지 않을 가? 한다. 이것의 이해의 지름길은 성서이다. 성서에서의 지식은 어떻게 이해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지식의 재료를 이것저것으로 제공하시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산 사람에게 살아있는 관계를 가지신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부르시면 사람은 이에 응답한다. 이 응답은 인격적 교제에서 사랑을 통하여 교류되는 인격적 이해에서의 만남이어야 한다.

  이렇게 성서에서의 하나님 지식은 우선 이런 과정에서 성사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믿어야 안다는 것은 이런 원칙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 뜻하는 바를 알리시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히브리 민족에게 여러 개인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였고 신약시대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더 완전히 계시하심과 동시에 그의 안에서 인간 구원의 경륜을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歷史)에 있어서 구약시대는 구원주(主)의 출현을 위한 준비의 시대이요 신약은 구원주가 오셔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구원을 천하 만민에게 선포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계시와 교훈은 그 완성자인 그리스도의 심정과 사상에 비추어 재 비판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산상설교에서 여러 실례를 말씀하고 있음에 유의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문제로 말씀하신다. 예로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말씀 하시기를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 함이로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사상에 최고의 권위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뜻에 합치되는 한도 안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생활이 규정 되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일깨워진 예언자와 사도들의 마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행위라고 인식한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증언을 포함하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성령이 우리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방법이 있다. 이와 같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인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유의해 보는 것은 성서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의 모든 제한에 지배되면서 그들이 인식한 진리를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의 빈약하고 부적절하고 표현력이 부족한 언어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말이나 문장과 마찬가지로 성서적 저자들도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들은 인간에 관해서 가장 심오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인간인 기자들의 증언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여기에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강보와 같다’ ‘강보는 초라하고 천하지만 그 안에 있는 보물은 아름답다’ 는 말이 인상적임을 알게 한다. 성서는 세상만사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된 문서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 없이 존재가 없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주제이다. 그리고 하나님 대(對) 사람과의 사건들이 기록되었는데 성서의 특징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방향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세상의 모든 서적은 읽고 보면서 독서로 터득하지만 성서는 삶의 현실에서 믿음으로 터득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수에 젖은 가을은 독서에 들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가을과 함께 인생을 영글게 함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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