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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독교와 백정들의 신분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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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8]

-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독립협회에 의해 최초로 개최되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열렸던 만민공동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민권신장을 골자로 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정부에 강력히 그 시행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개막연설문의 주요 골자이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국편민(利國便民,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함)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이 연설문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었다. “한국사에서 근대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집회가 열리고 민중이 등장하던 시점에 민중의 대표로 백정 출신인 그가 관심 합심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는 기독교 복음이 당시 한국사회에 끼쳤던 변화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박성춘이 조선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받던 계급인 백정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백정은 조선사회의 속죄양이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고,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는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교수형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다.” 백정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마저 누릴 권한이 없었다.

상투를 들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성씨조차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종이나 아이들에게까지 항상 존댓말만을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자녀가 날 때까지 망건은 물론 머리를 묶지도 못했다. 백정이 장가들려면 말 대신에 소를 타고 갔으며,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널판지 위에 앉아서 결혼식장에 가야했다.

조선사회에서는 백정 신분을 벗어날 어떤 길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바뀌어 만민공동회의 개막식 연설을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대표로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바로 기독교 복음에 그 비결이 있었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이었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규정지어 오던 신분차별의 악습을 철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앞의 사건도 기독교가 주도해 왔던 백정해방운동의 열매였다. 여기에는 1892년 내한한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 선교사의 공헌이 지대했다.

사실 박성춘은 무어 선교사의 첫 번째 백정 신자였다. 원래 천주교 신자였던 박성춘은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의 치료를 계기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1895년 초 서울에 콜레라가 만연할 때 박성춘도 그 병에 걸리게 되었다.

제중원의 에비슨 의사는 무어 목사와 함께 관자골 백정구역에 종종 왕진하며 진료하였다. 박성춘의 아들 봉출이가 무어의 예수교학당을 다니녔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도 에비슨의 치료를 받게 되었다. 박성춘은 고종의 시의(侍醫)인 에비슨이 자신과 같은 천민을 직접 치료해 준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박성춘은 1895년 4월 초에 세례를 받고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처음에 자신의 백정 신분을 숨겼지만 그것이 알려지면서 곤당골교회는 반상의 구별로 인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양반들은 하인이나 다른 상놈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참았지만 백정만은 안 된다고 완강히 반대했다. 귀천분리(貴賤分離)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허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정과 양반의 구분 없이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를 꿈꾸었던” 무어는 교회에서의 계급 구분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며 양반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이 문제로 무어와 한동안 줄다리기를 하던 양반들은 분리해 나가 결국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무어는 복음의 정신까지 포기하면서 양반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한편 무어는 1895년부터 본격화된 백정신분 철폐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그해 4월 무어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최 선생은 박성춘을 도와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개정해 달라고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거기에는 무어의 편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해 6월 6일는 백정신분을 철폐한다는 포고문이 거리에 나붙었다. 이제 백정도 망건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양반의 구타나 재산탈취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날은 백정의 출애굽과 같은 날로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무어 선교사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노에 해방 선언을 듣고 기뻐 헸던 모습은 이곳 한국의 백정들이 초립을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것보다 덜 기뻤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너무도 좋아서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초립을 썼다는 사례도 있다”고 적고 있다.

신분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백정들은 자신들의 신분향상을 위해 자녀교육에 매진했다. 교육은 신분상승의 가장 좋은 통로로 생각되었다. 아마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녀교육에 가장 많은 열정을 쏟았던 그룹들 중 하나가 백정일 것이다. 1920년에는 백정의 자녀들 가운데 40%가 학교에 다닐 정도였다. 이는 당시 서민의 자녀들 가운데 5%가 학교에 다녔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실례로 박성춘의 아들 박동열도 1907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7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뒤바뀌는 세상을 품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최근 한국사회 및 한국교회는 은연중에 자리 잡은 계급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초기 한국교회가 가졌던 복음 정신의 상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늦기 전에 선진들의 생생한 복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pd_465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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