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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미산(須彌山) 에서 바라 본 갈보리산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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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분쟁중재위원회의 발족에 즈음하여
- 심종석 교수(본지 객원논설위원/경영학박사, 법학박사)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로 유명한 현대불교계의 거목 성철스님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그간 이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끼친 해악을 쌓아 두었다면 가히 수미산에 버금간다고 할 것이니 그 해악(害惡)을 갚기 위해서는 겁(劫 ;Kalpa)의 세월이 부족할 만큼 속죄하여야 할 것이로되...”

생각건대 종교적 차원을 떠나 이 같은 그의 고백은 가히 경탄할 수밖에 없는 존경의 이유일 수 있고 또한 그 다음세대를 이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되새기기에 충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말이다.

소위 속세를 떠나 평생을 산중에 거하면서 그가 보인 참선[敬虔]의 생활은 응당 외로운 고행의 연속이었을 것임에도 이처럼 남에게 끼친 해악을 그 스스로가 되새겨 세상 앞에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인격을 가늠함에 있어 단지 일편의 예화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름지기 논자가 이 지면에 먹물을 묻혀 성철스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되새겨 피력하고 있음은 이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적 시각에서는 인간 성철 그 스스로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민하였던 구도(求道)의 해(解)를 간단하게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 28)”라고 제시하고 있음에 비추어 보면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한 성철스님의 구도의 한 평생이 측은하게 여겨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 지면에서 논자가 되짚어 두고자 하는 사실은 그보다는 이 같은 고백으로부터 돋보이는 인간 성철스님의 신앙적 양심(良心)에 있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도 기독교가 전래되어 생명의 말씀이 동틀 무렵, 성철스님에 빗댈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의 선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孫良源; 1902~1950), 순교의 삶을 살았던 주기철(朱基徹; 1897~1944), 청빈하고 도 경건한 삶으로 한 평생을 지쳐왔던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님 등은 모두 같은 반열에서 존경할 수 있는 선대들이다.

또한 결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사실은, 배곯고 헐벗던 비참했던 시절, 밑바닥 삶의 인생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의 선대들이 한국교회 성장의 배경이 되어 있다고 하는 추상같은 사실이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서 소리 없이 숨죽여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안타깝게 기도로 간구했던 존경할 수 있는 역사적 산 증인들로서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는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존경해야 할 선대이자 신앙적 푯대이기에 마땅하다고 하는 의미로 바꾸어 말 할 수 있다.

이 같이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대들은 척박한 갈보리산의 구릉을 피 흘리며 지쳐간 한 청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안타깝게 애쓴 동역자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사랑에 대한 대가(對價)에 보답하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힘쓰며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모름지기 크리스천의 명패를 두른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들 삶의 면면을 가슴에 새겨 이 세상에 거하는 중에 마땅히 계승하여야 할 유업[信仰]으로서 또한 늘 우리가 호흡할 수 있는 삶의 이유로써 각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와 같은 갈보리산의 정취에 저녁노을이 덮일 무렵 차마 눈뜨고 보기에 가혹하리만큼 루시퍼(Lucifer)의 역사가 유입되었다. 이 역사는 급기야 우리가 자랑스럽게 계승하여야 할 유업과 충돌하여 마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치루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을 온통 선연한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듯 하다.

경호원이 신성한 설교의 단상을 휘두르고 교회를 직장으로 또한 목회자가 노동자의 지위를 구하고 있기도 하며 청빈한 삶의 표상이 되어야 할 목회자의 퇴직금에 수십억이 오가며 목회자의 직분을 남용하여 강단을 세습하기에 이르고 세상의 권력구조를 본 뜬 정체불명의 기구를 수없이 창설하기에 익숙하고 또한 그 꼭대기 단위에 성큼 올라가 존재의 근거 없는 소위 교권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가 하면, 신성한 교회 내에 앞 뒤 없이 사회법의 적용을 우선하기 십상이고 그들의 이해(利害)를 구하기 위하여 교회와 교단을 동서로 또한 남북으로 찢고 거룩한 주의 종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주의 종 이라는 만부당한 호칭을 통해 계급적 지위를 앞세우는 등 차마 눈뜨고 보기에는 역겨운 현실들이 갈보리산의 저녁 노을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 작금의 양태이다.

어디 이뿐이랴 십일조의 중요성을 설교한 목사가 구제비를 받으러 온 노숙자를 폭행하고 교회 앞에 잠시 주차된 차량에 대하여 불법주차로 경찰에 신고하는가 하면 목회방침에 걸림돌이 된다며 장로의 사직서를 강요하고 목사청빙에 있어 이력을 허위로 날조[欺罔]하여 급기야 그 뜻대로 위임받기에 이르고 임종예배를 마다하고 늘상 사우나에서 몸을 달래고 있는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낱 교계 또는 교회 일부의 문제 또는 어쩌다가 그럴 수도 있었던 문제로 치부해도 괜찮을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혹여 나귀 탄 발람(Balaam)이 이제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면 이는 과장된 언사일까?

기실 지금도 수미산의 고백에 비할 수 있는 갈보리산의 고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피기에 진정 신실하고도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음은 이 같은 역겨운 현실들이 눈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견이나마 논자가 그간 지켜본 교회법의 실체 내지 집행은 목회자 스스로의 안위와 장래를 담보하기 위함에 목적을 두고 그 적용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고 적시해 두고자 한다. 따지고 보면 위와 같은 분쟁과 분열을 해소하거나 방지하기 위하여 교단 또는 교회에 재판국 분쟁처리위원회 조사위원회 수습위원회 특별위원회 등과 같은 기구가 존치되어 있음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같은 기구들이 개별사건 사실에 대하여 구속력 있는 판시와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위 세상과 교회, 교단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비유컨대 ‘가재는 게 편’ 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속언이 일러 무심한 말이 되었음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 척박한 골고다의 언덕을 지쳐 끝내 가장 비참하게 이생을 마감한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하여 또한 그 나라를 위하여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살릴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자가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나서야 할 자가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며, 가진 것을 부단히 나눠 나보다 못한 자를 위하여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는 주체도 크리스천이여야 하며, 이로 인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앞서 이를 감당하여야 하는 것도 크리스천의 몫이 되어야 한다. 이는 세상을 위하여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방법을 찾고자 안타깝게 애써야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마땅한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본지는 이와 같은 크리스천의 마땅한 삶의 이유를 담보하기 위하여 또한 앞서 예시한 수미산의 고백과 갈보리산의 저녁노을을 우리 삶에 일편이나마 되새기고 곁들게 하기 위하여 기독중재위원회의 발족을 계획하고 있다.

발족의 취지는 신앙의 선대들에게 버금갈 수 있는 장래 우리의 후세들에게 그 신앙적 지평을 넓혀주고 또한 우리 또한 자랑스러운 선대로써 기억될 수 있는 계기를 도모하기 위함 에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때 묻지 않은 교계, 학계, 법조계의 젊고도 신실한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계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충정을 그 배경에 두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기독중재위원회의 발족에 즈음하여 기대하지 않은 무수한 난관과 장애가 예상되나 이와 같은 취지와 배경이 한국교회 자정운동의 일환으로써 우리사회와 기독교계에 견고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우리 크리스천 모두의 관심과 기대가 뒷받침되어야 할 때다.

수미산에서 바라 본 갈보리산의 저녁노을 가슴 벅차고도 감동적인 정취로서 우리 가슴에 새겨지고 깃들어져 마침내 그 구릉을 지쳐간 한 청년이 보기에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어 우리의 후세들이 지쳐갈 새로운 날에 이르러 더 이상은 이 기독중재위원회가 필요 없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이 꿈꿀 수 있는 갈보리산의 저녁 노을, 그 새로운 날의 정취를 이제는 우리가 화폭에 담을 때다 수미산을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 심종석 교수(크리스천투데이 객원논설위원/경영학박사, 법학박사)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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