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여백의 지혜

첨부 1


- 강준민(LA동양선교교회 목사)

지혜는 여백에 있다. 여백은 비움이다. 예수님의 지혜는 여백의 지혜요,비움의 지혜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빌 2:7).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신 후에 그 빈자리를 은혜와 진리로 가득 채우셨다(요 1:14).

가득 찬 그릇보다 귀한 것은 텅 빈 그릇이다. 이미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 것도 채울 수가 없다. 이미 가득 찬 그릇은 변화의 가능성도,성장의 가능성도 없다. 그런 까닭에 가득 찬 그릇보다 텅 빈 그릇이 아름답다.

노자는 “항아리를 쓸모 있게 하는 것은 도공이 빚는 흙이 아니라 항아리 안의 빈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항아리가 쓸모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 흙덩이와 같은 탐욕과 이기심을 비워야 한다. 미움과 질투와 시기를 비워야 한다. 헛된 욕망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때 우리는 쓸모 있는 그릇이 된다.

여백은 아름답다. 동양화의 아름다움은 여백에 있다. 여백은 여유를 준다. 여백은 안식을 준다. 여백은 평강을 준다. 음악의 아름다움도 여백에 있다. 음악의 여백은 쉼표다. 음악의 감미로움은 쉼표에 있다. 쉼표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백이다. 쉼표는 끝이요,시작이다. 쉼표는 음악과 음악을 연결시키는 다리다.

여백은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가슴 아픈 소리를 내는 피리는 속이 비어 있다. 피리의 애절한 소리는 텅 빈 여백에서 나온다. 비움이 있기에 소리가 있고,비움이 있기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참된 사랑은 여백에서 나온다. 깊은 친밀함은 여백에서 나온다. 늘 함께 있다고 친밀한 것이 아니다. 지나친 친밀함이 친밀함의 적이다. 참된 친밀함이란 여백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함께 있음을 갈망하고,함께 있을 때 홀로 있음을 갈망한다.

인류의 역사는 여백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 여백이 십자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여백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되는 아픔의 현장이 십자가였다. 그러나 십자가의 여백이 새 역사를 창조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킨 다리였다. 십자가는 여백의 장소요,연결의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사랑하고,십자가를 자랑한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