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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장로교단 총회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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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달익 목사(서문교회)

해마다 9월 중순이 되면 우리나라의 각 장로교회들이 교단총회를 개최하여 1년간의 선교사역을 점검하고 새 임원들을 선임하여 1년을 맡기게 된다. 우리나라에서의 장로교회는 전체 기독교의 70%정도를 점유하고 있어서 가히 대표적 교단이라 할 수 있고 언필칭 장자교단이라함이 틀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장로교회가 교단으로 공식 출범한 것은 언드우드선교사 (1959∼1916)가 1885년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입국한지 22년 뒤인 1907년의 일이다. 이때는 1905년의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된 직후여서 국가적 절망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우리 국민의 모습을 에모리 대학의 총창이었던 캔들러(W.A. Candler)는 한국방문을 마친 뒤 쓴 글에서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 심통(心痛)하는 남녀를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보기 전까지는 온 겨레가 온통 그 뿌리에서부터 좌절한 모습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한국은 이제 땅위의 희망은 없는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안팎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세기를 두고 추구한 일본의 야망이 성취되고 한국은 그 마지막 독립의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 서양지식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는 마음이 찢어지고 뿌리까지 절망감에 젖어든 모습이였다. 이런 때 교회는 오히려 미래를 바라보며 독노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차원의 희망을 위한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1905년 비탄의 시기에 스왈론선교사(W.L Swalon 한국명 소안련 1865∼1954)는 ‘하늘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송가를 통해 당시 교회의 희망을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의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이 찬송가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궁극적 승리에 대한 신앙이 절망에 빠져있던 이 민족에게 다시한번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의지를 부여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를 질과 양의 모든 측면에서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시기에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노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 개교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제1회 졸업생 7인을 목사로 임직하였다. 초대노회장인 사무엘 모펫목사는 취임설교에서 ‘이 노회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십자가를 튼튼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세상 사람앞에 영화로운 빛이 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노회를 이룩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장로교 독노회의 출범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5년뒤인 1912년 9월1일 드디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어 오늘에 이르는 장로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출범당시의 장로교회는 비탄과 절망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고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놀라운 비전과 헌신에의 열정으로 충만했다.

뒤돌아보면 당시 독노회를 비롯한 초기 한국장로교회는 우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증거하는 교회였다. 지나친 정치 도구화를 경계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려 노력해온 순수한 교회였다. 둘째는 처음부터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강조해온 에큐메니칼정신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독노회가 설립한직후 ‘만국장로교 연합공의회’에 독노회 설립사실을 알리고 그 명부에 기입해 줄것을 정식 요청하였던것은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정신의 근원을 보여준다. 셋째는 민족현실에 깊이 관심하여 헌신하는 교회였다. 독노회 창립당시 세례교인 17890명 조직교회가 38교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교회가 운영하는 각급 학교가 402개교였다. 등록학생수는 8611명이나 되었고 1906년의 헌금은 47113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을 1907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존 모트박사(J.R Mott)는 ‘한국은 근래 선교역사상에서 완전히 복음화된 유일한 비기독교 국가가 될것임을 확신한다.’라고 감탄하며 설명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oth Keith)는 ‘중국인은 서구 선교사들보다 한국에서온 기독교인들에게서 복음을 더 듣고 싶어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이야 말로 아시아 복음화에 절대적 공헌을 남길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망했다. 환난과 박해 가난과 심통의 시기였으나 교회는 거룩함과 순결, 그리고 희생과 열정으로 충만하여 민족의 내일까지 밝아 보이게 하는 소망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런 거룩한교회인 우리장로교회는 그후 신사참배 결의에서의 굴종, 교파분열과 난립, 지도자들의 역사의식 결핍들과 겹치면서 외형적인 성장에서 불구하고 그 영광이 퇴색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왔다.

금년으로 91회 총회를 맞는 장로교회의 현주소는 어떤가? 해마다 맞이하는 총회때가 되면 각종 인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부 총회장선거에서부터 각부 위원회의 임원선거에 이르기까지 동원할수 있는 모든 방법이 다 동원된 선거전쟁을 치러야 한다. 지연, 인맥, 학연 각종 집단들이 한데 뒤엉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면 진액이 다 빠진다. 총회내의 모든 단체들은 저마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 싸움판에 뛰어들게 되고 이를 위해 후보자는 자의 반 타의반의 불법선거에 휘말려 영혼과 양심을 더럽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선된 사람은 도덕적 권위 부재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되고 이것은 결국 교회 전체의 멍에가 되어있다. 이것은 한 두해의 문제가 아니다. 혼란에 빠진 국가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교회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고 총회의 행정시스템이나 선교동력 관리와 양성 체계의 점검 등 해야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총대들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다. 각종통계에 거품이 있어도 회개할 줄 모르고 신앙적이지 못한 교회정치 행태에 대해서도 큰 반성이 없다. 물론 이렇게 온통 비관적인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한한 잠재력과 열정, 세계선교를 향한 넘치는 에너지가 있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수많은 인적 자원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스스로의 모습에 대하여 냉철한 자기반성을 통해 100년 전 1907년 독노회 설립당시의 신앙과 처절한 사명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한번 온 국민과 세계인으로부터 ‘한국과 아시아, 세계의 희망은 한국교회이다.’ 라는 평가와 기대를 모을 수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갱신시켜야 한다.

내년이 1907년의 대 부흥운동과 장로교 독노회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냥 보내지 않으려면, 1세기만에 또 다른 부흥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영적 성찰이 처절해야 한다. 의식의 전환을 이루고 제도를 21세기에도 적응력이 있도록 바꾸고 정치 기구화된 모든 모임들을 선교기구화 해야 한다. 동시에 교회와 교인들의 도덕적 성숙을 이루어 ‘선한 교회’가되도록 해야 한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노인들의 마지막 삶을 돌보는 Diakonia적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더 많은 사람, 더 세련된 신학, 더 풍부한 자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급하고 강한 바람 같고 불의 혀 같이 갈라져 각 사람위에 머물러 계신 성령의 강력한 힘과 능력이 필요할 뿐이다. 금년 장로교 총회를 통하여 이 불순한 찌꺼기들과도 같은 불신앙과 비양심의 낡은 관습들이 성령의 바람에 날려가고 우리 안에 깃든 각종 악습들이 불로 태워지는 거룩한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교회의 영광을 되찾는 원년이 되었으면 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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