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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레의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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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영 박사(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대구도시가스 사장)

<칼레의 시민>은 조각가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1917)이 제작한 조각상입니다. 프랑스의 북부 도시 칼레가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의해 포위됐을 때 도시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자원한 6명의 영웅적인 시민들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1347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때의 일입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저항해 오던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레의 항복사절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모든 칼레의 시민이 처형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조건을 내 놓았습니다. “좋다.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명망이 높던 대표적인 시민 대표 6명은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처형되어야 한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였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나와 말했습니다. “자 칼레의 시민들이여, 나오라. 용기를 가지고.”

그러자 시장이 나섰습니다. 상인이 나섰습니다. 그의 아들도 나섰습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들이자 절정의 삶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들이었습니다. 드디어 7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습니다.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 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고 이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6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습니다. 모두 안 나온다고 해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민들은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당대 가장 유명한 조각가 로댕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입니다. 1895년 6월 3일 기념상이 제막되었습니다.

비장한 슬픔으로 얼룩진 이 조각상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교훈을 남겨 주는 동시에 한 알의 밀이 썩어질 때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일깨워 줍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 24:3]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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