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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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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메시지는 궁극교회 주일예배 설교 중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 1편)

인간세계에는 법(法)이 존재합니다.  이 법을 크게 나누면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이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법 하나 뿐이었으나 아담 타락 이후로 인간의 법이 하나 더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의 법이요, 인간의 주격체인 영(靈)의 법입니다.  인간 타락 이후에 생긴 인간의 법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유지의 법입니다.  이것은 행동과 활동에 관한 법이 되겠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어긴 사람이라는 말인데 법을 알고도 안 지켰거나, 몰라서 못 지켰거나 어쨌든 법을 어기면 죄인입니다.  혹 인간 법에 걸리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법에 가서는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법이요 도덕법이요 자연법이요, 더 나아가 자기 자체화 되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법은 영적인 면에서 자기 자체 내에서 그 효력성이 즉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큰 법(생명법 도덕법 자연법)을 생각해 봤는데 이제는 상호관계적인 면으로 들어가서 ‘죄인이다, 죄인이 아니다’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관계성적인 면에서 첫째는 대신관계(對神關係-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날 때부터 대신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왜 만드셨으며,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으며, 왜 세상만물 사건 환경 속에 나를 두셨는지, 그리고 왜 인간 나를 도덕성이 있는 자로 인격성 자로 만드셨는지, 그리고 그 후에는 왜 심판이 있는 자로 만들었는지, 왜 영원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건지?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 인간이냐, 무엇을 하다가 가는게 인간이냐’ 그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모르고 삽니다.  날고 긴다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라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침에 밥 먹고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와서 자고 하는 것도 세상목적이요, 노는 것도 세상목적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짐승들보다도 못하지 않습니까?  왜냐?  죽는 거야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 일반이지만 짐승들은 먹고 마실 걱정은 안 하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짐승들처럼 지었다고 한다면 인간은 그런 짐승들만도 못합니다.  인간이라는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을 넣어 만들었고, 영원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신령계 천국 구원이라는게 있어서 인간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임시성만 생각한다면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짐승만도 못합니다. 
인간으로서 임시성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인간들이 좋다고 하는 것, 행복하다고 하는 것, 명예 영광 부귀 등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죽기도 하고, 고통이 오기도 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사는 짐승들보다도 더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가만 보면 예수 믿는다는게 참으로 행복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기에서 인간의 행복, 존재목적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이니까요.  천국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대신관계를 모르면 내가 나를 모르게 되고, 인간을 모르게 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대신관계를 바로 짓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세상 것을 가졌다 해도 복 있는 사람이 아니고 죄인입니다.

두 번째는 대아관계(對我關係-자기가 자기에 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자기가 자기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어떤 일에 확실하다고,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만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실패를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래볼까 저래볼까’ 망설이다가 시간만 보내고 유익을 놓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 때문이 아니고 자기가 몰라서 손해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행복을 향해 가다가 난데없는 죽음으로 값진 인생을 싱겁게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를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인간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다가 가야만이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영원히 후회 없는 삶이 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기를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예수 믿지 않았던 자기가 쳐다보이는 겁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제 나름대로 잘난 맛에 자기는 자기만큼 안다고 하며 살고 있지만 나이 먹은 어른 입장에서 내려다보면 ‘이놈아, 네가 그렇게 놀다가는 네 장래 일이 한심해진다’ 하고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 자기가 자기의 출생목적과 태어난 후에 재세(在世)기간의 목적, 즉 자기의 존재의 목적을 모르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려면 먼저 대신관계를 바로 지어야 만이 됩니다.  대신관계를 바로 짓지 않고, 모르고 산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많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대인관계(人人關係-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다른 사람과 바른 인간관계를 짓게 됩니다. 
세상에는 혼자가 아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지형과 기후와 언어와 풍습과 생활방식이 각기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인간이 자기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인인관계 연관관계를 짓고 살아가야 하는 건지, 가정은 왜 주었으며 사회는 왜 주었으며 국가는 무슨 뜻으로 나에게 주었는지를 모르고 살면 궁극적 결과에 가서는 자타에게 고통과 불행을 안겨준 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관계를 모르고, 자아관계를 모르고, 대인관계를 모른 채 바로 짓지 않고 살았다면 죽음의 선 저 너머에서 자타에게 순전히 고통과 불행을 준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사는게 그냥 사는게 아니고 산 그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자기와 하나님과 진리로써 직통관계를 가지고, 이 상태에서 이웃과 연관관계성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먼저 대신관계를 바로 지은 상태에서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주었고, 사회나 국가를 주었다 그 말입니다. 
대신관계 없이 인인관계로써만 산다면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건 전부 다 심판감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에서 명예 영광을 누렸다 할지라도 궁극적 신령계에 가서는 전부 다 심판감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이 이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대신관계 인인관계성을 바로 짓지 못하고, 모르고 살았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인간은 전부 다 자기 기준에 맞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점을 시인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남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 네 번째는 대사관계(對使關係-일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는 곳곳마다 늘 크고 작은 일을 만납니다. 
인간은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은 일을 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데 일을 안 한다면 죽은 사람보다 못합니다.  죽은 인간은 쌀값이나 들어가지 않지만 살아 있으니 쌀값 옷값이 들어갑니다.  그러니 산 사람이 일을 안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으로 오는 일(사건)도 있습니다.  눈사태, 지진, 홍수, 국가적인 일, 사회적인 일, 가정적인 일, 개인적인 일 등 인간에게는 크고 작은 사건이 교체되어 옵니다.  이 때 그 일(사건)의 처리를 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지, 인간의 기준에 맞춰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지? 
인간이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면 구원의 일이 잘 되고 튼튼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일을 하는 거기에는 인간의 행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기준해서 일을 하면 결국은 자타에게 불행을 가져옵니다.  인간기준에서 일을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물질적 이해타산에 두고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보통 보면 자기의 물질적 노력봉사가 시간적 손해, 물질적 손해가 날 성 싶으면 하지를 않습니다.  이를테면 다리를 하나 놓더라도 돈이 얼마가 들어가더라도 일이 바로 돼야 사람이 안전할 것인데도 일 처리를 물질욕심에 두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직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다 임시적인 것인데 이 임시적인 것에다 자기의 손익만 따진다면 자기의 영원한 이익을 손해보고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건을 교체시키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일하고 농사 짓고 하는 모두는 우리의 영인(靈人)의 성장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이 크고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 만들어지는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 만드는 일, 고치는 일, 살리는 일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입니까?  사람을 위해서라면 집이 날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물질이 거기에 쓰여져야 합니다.  사람 만드는 일이 그 만큼 크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지금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교훈을 하는 교회에 나오는 일을 놀러 가는 것이나, 친구 집에 가는 일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먹는 일이 있고, 사업적 일이 있고, 참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일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이 시간차를 두고 따로 따로 온다면 별 문제인데 따로 따로가 아닌 한 날 한 시에 동시적으로 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어느게 크고 귀한 것입니까?  우리는 이 선택을 바로 해야 하는데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선택을 바로 못하는데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사건에, 시간과 물질과 정력과 자기 일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사건을 교체시키는 것은 단순히 일 크게 하라는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의 수단 방법을 통해 사람을 깨닫게 하고,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소원을 두고 하시는 것입니다. 
대신관계를 바로 못하면 헛일만 하고 가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대신관계가 있고, 대아관계가 있고, 대인(인인)관계, 대사관계가 있는 자기입니다.  이건 국가법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대물관계(對物關係-물질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세상은 물질의 세계요, 인간은 이 물질 속에서 물질과 관계를 지어서 물질을 이용하고 활용하고 사용하고 응용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즉 자타의 이룰 구원을 위해 사용토록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어 가는 그 면에 이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생활 모두가 그렇습니다.  전부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룰 구원을 위해, 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그 일을 위해 쓰여지도록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물질을 가지고 나를 위해 어떻게 써야 바로 쓰는 것이냐, 어떻게 써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위한 바른 쓰임으로 나가게 되느냐 하는 면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이건 인간으로서 할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물질을 가지고 쓴다고 해도 그 물질을 쓸 때는 다른 사람과 관계성이 있습니다.  음식을 사먹든 쌀을 사먹든 다 관계성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 벌어서 물질을 먹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물질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떻게 써야 바로 쓰는 것입니까?  물질을 가지고 사건을 처리해야 되고, 물질을 가지고 인인관계성을 가져야 되고, 또한 자기를 위해 바로 써야 되고, 물질을 가지고 대신관계를 바로 가져야 되고 이런 것을 생각하며 물질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타락된 세상이지만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인간은 법 이전에 양심이 있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게 있습니다.  사람이 영인의 성장을 위해 물질을 바로 쓰고, 사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물질을 바로 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일반적인 겁니다.  자기가 현재 거처해 있는 그 사회가 잘 되도록 하고, 국가가 잘 되도록 해야 자기가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주신 물질을 존귀 가치 평가적으로 인간 머리 위에다 올려놓고 사는 사람은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물질을 옳게 쓸 줄 모르고 허랑방탕하게 쓰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이 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심판입니다.  자기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자기 몸을 세상 노라리 하는데 낭비하면 반드시 병이 듭니다.  이것도 책임추궁입니다. 
아무리 자기 몸이라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자기 혼자만 쓸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혜택을 줘야 합니다.  자기 건강을 자기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바로 써야 합니다. 
사람이 물질만능주의로 사는 것은 온전한 인격의 참 인간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부모가 인격의 성장을 몰라서 물질만능주의의 정신이 아들딸들에게 내려가면 사람이 바로 못 서고, 가정파탄이 오고, 이것이 나라의 혼란과 연결되니 국가존립에 위험이 옵니다.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참 인격의 사람으로 바로 서고, 바른 인격으로 성장하고, 주어진 물질을 잘 쓰면 그 사회는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큰 흔들림 없는 굳건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법도 어기고, 도덕법도 어기고, 자연법도 어기고, 대신관계를 모르니 또한 대아관계를 모르고, 대아관계를 모르니 또한 대인관계를 바로 짓지 못하고, 대인관계를 모르니 또한 대물관계가 바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르고 사니 지키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만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까지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면 죄를 짓고 살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입니다. 
일반사회에서는 어떤 국가적 사회적 법을 어기면 죄인이라고 하며 감옥에 가두지만 예수 믿는 우리가 그런 죄는 안 지었다고 해도 그보다 더 큰 인간이 출생 때부터 자기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법이 있는데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대신관계부터 바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갈 때에 사람이 기본적으로 바로 놓이는 것이고 바른 인격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슬픔뿐입니다.  대신관계가 바로 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바로 되지 못한 채 아무리 물질적으로 많이 가져봐야 그로 인해 행복은 커녕 점점 더 고통만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들을 실제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상에서 말한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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