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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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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50대에 이르자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렵, 전혀 예기치 않았던 병마가 그를 덮쳤다. 오로지 사업밖에 모르고 30여 년간 몸을 혹사한 결과였다. 승리자로서 뉴욕에 입성한 2년 동안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다. 기관지, 신경 계통에 문제가 생겼고, 위궤양도 앓고 있었다. 또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소화불량은 중증이었다. 입원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는 그는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해야만 했다. 점점 미라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세계 최고의 부자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에 백만 달러씩 벌어들이는 그의 수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돈을 위해 살아온 그였지만, 결코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정밀진단 결과 병원에서는 록펠러에게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언론은 록펠러의 죽음을 걱정하기보다는 그 많은 재산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억만장자 록펠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이 부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해 굳게 쥐고 있던 고삐를 서서히 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건강을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부디 제 건강을 돌려주십시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을 세상을 위해 보람 있게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자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록펠러는 이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아 갔다. 생활도 점차 건강해져서 잠도 잘 자게 되고 음식도 잘 먹게 되었다.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얼굴에 나타났다.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록펠러가 건강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였다. 그는 무심코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귀를 보게 되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나니."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울림이 생기면서 눈물이 났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고,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선사업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규사업을 벌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많은 권한을 임원들에게 넘기는 작업을 착수했다. 나아가서 그는 자선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록펠러가 자선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심을 굳힐 무렵, 미국사회에서는 스탠더드 오일의 트러스트를 해체시키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스탠더드 오일은 유전, 정유소, 탱크차 제작소, 총 20만 킬로미터의 파이프라인, 100여 척의 유조선 선단, 해외 보급로까지 갖춘 회사로서 가장 경쟁력이 높고 시대를 앞서가는 회사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탠더드 오일을 여전히 자본을 독점하는 독점재벌로 보고 있었다. 1890년, 의회는 '셔먼 반(反)트러스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기업 트러스트는 물론 생산, 판매, 무역 거래에서 모든 조직을 금지하고 있었다. 1892년, 오하이오 주 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의 오하이오 자회사 트러스트에서 탈퇴할 것을 명령했다.

록펠러는 세계 시장을 100% 지배하겠다는 꿈이 지나치게 높은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의 꿈을 접었다. 대신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못잖은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는 위대한 자선사업의 트러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석유산업을 지배했던 방법을 자선사업에도 적용하기로 작정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자선사업과 기업경영을 접목시키면 자금을 절약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좋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자선사업이야말로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자본주의 비판 세력들은 정부가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록펠러는 정부가 부를 공정하게 재분배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선사업으로 재산을 지혜롭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선사업을 주관할 엄청난 규모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맨 처음 교육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1903년 '일반교육위원회'를 창립했다. 이 위원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교육 사업을 펼쳤는데, 약 1억 3,000만 달러에 달하는 록펠러의 기부금으로 수천 개의 고등학교, 농업학교, 의대 등을 지원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업은 미국의 전문 의학 교육을 개혁하고 표준화한 것이었다. 특히 24개의 종합대학을 후원했는데 존스홉킨스대학,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컬럼비아대학, 시카고대학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록펠러는 사업에서 보여준 놀라운 천재성과 성취력을 자선사업에서도 발휘하기 위해 우선 구상 단계에서부터 많은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했는데, 그 중에는 38세의 프레드릭 T. 게이츠 목사도 있었다. 뉴욕 토박이인 게이츠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된 사람으로 준수한 외모에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1891년 3월, 록펠러는 시카고대학을 후원하기 위해 결성된 침례교회 전국 지도부 모임에서 게이츠를 처음으로 만났다. 논리적이면서 활달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사무실로 그를 초청했던 록펠러는 게이츠야말로 자신이 앞으로 벌이고자 하는 자선사업을 관리해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석 달 뒤, 게이츠는 록펠러가 벌이는 자선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게이츠는 가장 먼저 록펠러에게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설립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록펠러에게 인류애를 위한 사업에는 시간과 장소, 법의 제약이 없으며, 스스로 영구히 지속되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록펠러는 그 의견에 동의했고, 그 첫 번째 결실로 1901년 미국 최초의 의학연구소인 '록펠러 의학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존스홉킨스대학 의학부에서 최초로 정규직 교수의 완전 고용제를 지원해서 미국 내의 기초의학연구 기반의 확립에 기여했다. 또 연방정부 사회위생국을 20년간 장기 지원하기로 함으로써 실험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기초의학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이 연구소는 황열병의 백신과 소아마비·폐렴 백신을 개발하는 등 중요한 의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연구소의 중요한 성과는 치료제의 개발뿐만 아니라 공공의료 보건 활동의 전개에서 세계적으로 선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록펠러 연구소에 몸담은 의사들 중 19명이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연구소의 진가를 세계에 알렸다.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를 결정했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는 묘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주주들이 각자의 지분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사상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기 시작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이 유례없는 상종가를 쳐서 이전의 트러스트의 가치를 극적으로 부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으로 스탠더드 오일 계열의 주식을 살 수 있게 된 일반 시민들이 오히려 스탠더드 오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가치는 5개월 만에 4배로 늘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2억 달러였던 록펠러의 총재산은 트러스트 해체 이후 1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록펠러는 이제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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