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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수님에게 사생애가 있다면 구원의 주가 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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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게 사생애가 있다면 구원의 주가 될 수 없다.

흔히들 신학적인 면과 성경의 역사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생애 중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전까지의 30년간의 기간을 사생애라고 하고, 그 이후로부터 죽으시기까지의 3년의 기간을 공생애라고 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면에서 그렇게 구분하는 분들이 어떤 면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제가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구분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예수님의 일생을 공생애와 사생애로 구분을 하는 분들이 그런 생각 하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자칫하면 예수님께서 사생애 기간인 30년 동안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한 삶이 아닌 단지 예수님 자신을 위한 삶을 사시다가 30년 후에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부터는 당신의 택자들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하신 것으로 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30년 동안은 당신 마음대로 살다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에야 ‘아차, 내가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왔지’ 하면서 그 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택자들의 구원사역을 하신 것으로 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굳이 제가 이런 어조를 말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택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그것만으로는 구원의 자격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인간의 죄를 사해줄 분은 원죄고 자범죄고 전혀 없어야 만이 가능한 것이니 이런 분은 이 세상에는 신인양성일위로 동정녀로 통해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죄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의 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티끌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어긋난 그만큼 하나님과는 이질적이니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이어야 만이 무죄인으로서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어떤 면으로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인격적 의사적 사상적 소원 목적적 관계성적인 면에서도 하나님과 한 순간이라도 끊어짐이 없어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만 인간구원을 위한 삶을 사셨고, 세례받기 전까지는 사적인 생애를 사신 것이라면 그 사적인 삶이란 곧 인간구원을 위한 삶이 아닌 예수님 자신을 위한 삶이라는 말이 되니 예수님의 그 기간 동안의 삶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과 의사단일적 삶이 아닌 기간이 있었던 것이고, 그 순간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내셨는데 예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한 그 삶을 살지 않은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이렇게 되면 그 순간동안 하나님 앞에 죄적인 삶을 사신 것이 되니 죄인이 되신 그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자들의 구원을 예정 계획하셨고, 영원 전부터 계획된 그대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신데 그런 분께서 한 순간이라도 택자들의 구원을 위한 삶이 아닌 당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으셨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십자가를 지러 오셨는데 막상 십자가를 질 시간이 다가오자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밤새도록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자 할 수 없이 ‘그러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서 십자가를 지신 식의 주님일 수는 절대 없으신 것입니다.(주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마치 예수님께서 인간구원을 위한 삶이 아닌 순간이 있다거나, 십자가를 억지로 지는 식의 주님으로 표현을 하는 것은 금해야 할 것입니다.

### 이 글과 관련된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장 36절)
[궁극(窮極)교회 5호]
본문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보면 예수님께서도 인간인지라 인간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막상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가까이 오자 그 고통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밤이 새도록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기까지 십자가 지는 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를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시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그러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하는 말로 들리기 쉽다.  또한 좋게 해석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 땅에 와서 33년간 사시며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 십자가에 달릴 시간이 다가오니 가급적이면 십자가를 지지 않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그 내용을 액면적 문자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신 그 분의 소원과 목적과 인격과 사랑을 잘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로 계시면서 십자가의 사건을 예정, 계획해 놓으셨다.  그리고 선지자들과 종들을 미리 보내셔서 당신이 이 땅에 와서 죄와 사망을 정복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구속하여 천국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예언하게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도 죄인 나를 위해 오셨고, 33년간 죄 없이 살으시며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리며 살으심도 나를 위해서이고, 십자가를 지심도 나를 위해 지신 것이고,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모두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곧 인간 나는 주님의 인격적(人格的) 애정적(愛情的) 수수관계적(授受關係的) 대상자인 것이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고 천국에 가서도 그 분과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영원히 가지게 될 나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죄와 사망에 포박돼 노예상태에 있는 나를 그대로 둘 수 없는 사랑의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은 주님 당신의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과 나와 연결을 시켜 주는 결정적인 순간인 것이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과 전 인격은 나와 하나님과의 연결에 총 집중인 것이다. 
이 중보의 사역은 세상창조 이전, 더 나아가 천국도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영원 전부터 당신의 의중(意中)에서부터 계획, 설계된 전무후무한 사역이다.(디도서1:2, 에베소3:11)
사단 마귀는 이 귀중한 사역을 이루지 못하도록 별의 별 수단을 다 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때는 물론이고 이 땅에서 복음사역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구원의 절정인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최대의 발악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게 해 육체적인 고통을 주어 순간적으로라도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다른 데로 쓰게 해서 나를 하나님과 연결이 되지 못하도록 갖은 수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서 자신을 건져 주지 않는다고 순간적으로라도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했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 이로 인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33년의 살으심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모두(중보사역)는 헛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가 있으면 사망에게 포박되는 것이니 예수님 역시도 우리와 똑 같은 인성(人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그러나 죄는 없으시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만일에 하나님 앞에 티끌 만한 죄라도 있게 되면 주님 역시도 죄인이요 사망에 포박된 상태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고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천국에 가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죄인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한다는 말인가?  자신의 죽음도 정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죽음에서 구원한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 하나도 지옥에서 구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지옥에서 건져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하신 이 기도가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기도를 땀이 핏방울처럼 맺히도록 밤새도록 했는데도 응답이 없으니까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하고 이제는 포기하는 상태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마친 것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인 성도 나에게 향하신 소원 목적은 구원이다.(궁극적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 구원-기본구원 및 성화구원)  역시 성령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소원 목적이다. 
이 점을 전제로 하고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세상에 가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명령대로 세상에 와서 살다가 이제 막상 십자가를 지려고 하니 너무나도 두렵고 고통이 심할 것 같아 그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소원 목적과 비 단일로 나가는 예수님이라면 그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죄인가, 의인가?  물론 답은 자명한 것이다.  주님이 이런 죄인이라면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있겠는가? 
만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과 종교권과 세상권을 동원해 어떻게 하던지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 죄를 짓도록 해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마귀의 궤계에 예수님은 패배하는 것이다.  바로 이 패배의 쓴잔을 안 마시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질 때 마귀가 인간을 충동해 당신에게 극도로 고통을 주어 그 고통으로 인해 당신이 하나님께 원망의 죄를 짓게 해 인간구원의 자격을 상실케 하려는 마귀의 궤계를 미리 알고 원망 불평의 그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이다. 
잔은 십자가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잔 속에 들어 있는 뜻이 중요한 것이다.  빈 잔을 들고 마시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기도를 하시는 주님의 소원성과 마음을 안 다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하는 말씀이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히 구원할 수 있도록 빨리 십자가를 지게 해 달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마음을 이해만 한다면 마가복음 15장 34절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도 심해서 지르시는 비명의 소리라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고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성업을 완수한데서 나오는 기쁨의 탄성으로 들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자기가 희생이 되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자원적으로 기쁘게 자기 몸을 희생시키는 것을!  또한 자기 아들에게 자신의 신장을 하나 떼어 주면 자기 아들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신장을 떼어 주는 것도 우리가 종종 보고 들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본문을 당신의 백성이 죄와 사망과 고통 중에 노예로 허덕이고 있는데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천국을 버리고 세상에 와서 막상 십자가에 죽을 것을 생각하니 그 고통이 너무 무서워서 십자가
가를 안 지게 해 달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타락된 인간보다도 더 비굴하고 못난 인간으로, 저질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격이다.  오늘날 주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래도 영원 전, 즉 천국을 만들기 이전, 이 우주 만물을 만들기 이전,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부터 나를 당신의 의중에 두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과 같은 차원의 능력자 존귀자 존영자로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그 지극한 사랑의 주님이 막상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질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떨려서 그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정도의 주님으로밖에 안 보여지는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말씀을 하신 그 분의 인격과 소원과 사랑을 모르면 이렇게 웃지 못할 말을 하게 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는 성도들이여!  나중에 천국에 가면 이 잔을 옮겨 달라는 말씀이 십자가를 안 지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었더냐고 예수님께 한 번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실런지?

궁극교회 홈페이지: http://909.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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