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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십일조 드림이나 주일성수가 율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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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드림이나 주일성수가 율법인가?

십일조 문제나 성수주일 문제 등에 관해 논하면서 이런 것들을 신약에 와서 주장하거나 지키는 것은 율법을 따라 지키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의 사적인 욕심으로 그런 것을 강조하다 보니 현재 한국교회가 그러한 잘못된 율법적 신앙이 진리인양 굳어져 버렸다고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의 주장 중에는 일부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옳은 말인듯 합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이런 분들의 말대로만 나간다면 아마도 신앙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진보가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아니, 한국교회는, 특별히 교역자들은 이 분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동안 자신들의 아집과 욕심을 위해 성도들을 율법적인 신앙에 묶어놓은 점을 시인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은 옳은 말이지만 어느 한 면으로만 극단적으로 치우지게 되면 본래의 목적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바리새적인 신앙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 율법적인 차원에서 십일조를 한다면 그 말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는 교역자 분께 월정 사례금을 드리는 대신 성도들이 낸 십일조를 모두 다 목사님께 드려서 그 돈을 그 목사님 마음대로 사용하시도록 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구약에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를 제사장이 어려운 이웃이나 고아나 과부 등을 도왔던 것을 참고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럴 경우엔 그 교역자 분을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신뢰할 때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하는 것은 율법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도들이 담임교역자의 신앙양심을 믿고 그 교회 목사님께서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최소의 돈을 사용하시면서 남은 돈은 목사님의 판단에 따라 구제나 선교 등등에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사실 이렇게 한다는 게 한국의 성도들과 교역자들의 양식이나 행태를 볼 때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위험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교회가 이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한 십일조를 드리는 성도의 입장에서도 율법적 차원이 아닌 구약의 십일조를 하나의 참고로 삼아 각자의 신앙을 따라 구약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서 교회운영이나 선교사역 등에 사용하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드린다고 하면 이런 경우에도 율법적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구약에 돼지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따라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물론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영적 계시적인 뜻도 있는 것이지만 문자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해 어련히 알아서 먹지 말라고 하셨겠느냐고 하는 믿음으로 먹지 않는다고 하면 이럴 경우에도 그 사람이 율법적인 신앙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저의 이 말에 대해 ‘그렇다면 곡식이나 짐승 등도 십일조에 포함되는 것인데 왜 돈만이 십일조인 듯이 말하느냐’ 라고 하는 분도 있겠지만 지금 그 면을 논하려고 하는 게 아님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성수 문제도 주일(일요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용어적으로 ‘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맞느냐 일요일이라고 하는 것이 맞느냐, 안식일 날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구약의 율법적 차원에서 주일을 지키는 게 아니고 주일날은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날이기 때문에 중요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말씀이 선포되는 날을 귀히 여기다 보니 주일을 철저히 지키게 되고, 또한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평온해야 만이 말씀을 받는데 있어서 집중력이나 이해력에 유익이 되기 때문에 주일날에는 오락도 삼가하고 물건을 사는 일도 삼가 한다면 이럴 경우에도 율법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실질적으로 한 번 시도를 해 보십시오.  주일날 교회 오기 전에 집에서 신나게 TV를 보다가 예배시간에 맞춰서 부리나케 달려와 설교말씀을 듣는다면 그 설교가 잘 와 닿겠습니까?  아마도 설교를 들으면서도 조금 전에 본 TV프로그램의 내용이 눈에 삼삼할 것입니다.
또한 예배 후에 무슨 물건을 사려고 했다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물건을 어디서 살까, 그 값이 얼마나 할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마음자세로 예배를 드린다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닌 말로 구약에 안식일 날에 오락을 금하고 매매를 금하는 등의 명령은 왜 하셨겠습니까?  단지 안식일 날이니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날이니 선포되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요소를 제하고 전 인격을 기울여 듣고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목사님께서는 이런 문제들을 율법적 차원에서가 아닌 앞에서 제가 예를 든 것처럼 은혜적인 차원에서 가르친다고 해도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 입장에서는 성도 각자의 신앙에 차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성도는 그것을 율법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하고 지킬 것이고, 어떤 성도는 은혜적인 차원에서 자원적 소원적으로 지키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요즘 복음성가니 CCM이니 하면서 의례히 율동들을 하는데 이렇게 하는 사람들의 주장인즉 다윗도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오니까 너무 좋아서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듯이 자신들도 춤을 춘다고 합니다만 사실 그러는 분들이 다윗의 신앙의 발뒤꿈치라도 잡고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한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윗의 신앙 언저리에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마치 흥풀이 하듯이 하니까 문제이지요. 

저는 좋게 해석하고 싶은 게 아닌 말로 제일 처음에 찬양을 하며 율동을 한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주체할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본 다른 분이 그것을 보고 그 춤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고 예술적으로 다듬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그런 식으로 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해서 지금의 율동이 되었고, 율동을 가르치는 신학교까지도 탄생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저의 추측이 옳다면 법궤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의 신앙과 오늘날 율동을 하는 사람들과 그 신앙의 차원이 과연 같을까요?  모르긴 해도 천지차이가 날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들어서 그 춤을 춘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해서 자신이 모를 정도로 소원이 돼서 자원적으로 나온 춤이었지만(마치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 성경의 율법을 따라 드린 것이 아니듯이, 성경엔 그렇게 드리라는 말씀이 없지만 다만 주님이 너무나 좋아서 드렸듯이) 오늘날 율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윗처럼 춤을 춘다고는 하지만 춤을 추는 그 사람의 속은 은혜적 차원에서가 아닌 경우가 많듯이 앞에서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런 식으로 목사님께서는 옳게 가르쳤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율법이 되어 지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은혜적 차원에서 하는 율법성적(율법적이 아님)인 행위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아예 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십일조나 주일성수 등을 아예 하지 말라고 한다면(이런 것들을 율법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 아님을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하도 오해들을 하고 엉뚱한 말을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만이 아닌 감사헌금이나,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성경을 보거나 기도하는 것, 세례나 성찬, 교회의 절기를 지키는 것 등등의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계절적으로나 어떤 형태로 건 종교적인 사역이나 활동을 정해놓고 하는 것들 모두는 일종의 율법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도 다 폐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신앙이라는 게 무엇이 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게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내가 그 하나님의 것으로 자체화 인격화 실상화 되는 것이 기독교인데 방금 말씀드린 식대로라면 기독교가 불교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서 명상이나 하고 자기 수양이나 하는 종교가 돼 버리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불교처럼 그렇게 하는 것 역시도 그런 식으로 따지고 보면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성문계시적 율법만이 아닌 정신과 사상적인 면에서의 율법성적인 것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인데 어떤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율법이냐, 은혜냐’ 라는 기준을 가지고 논하다 보면 이런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결국은 율법이니 폐지를 하자는 주장이 율법을 폐지하자는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십일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마치 하나의 법처럼 주장을 하게 되니 결국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하는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용어적으로 말한다면 신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인 줄 압니다만 신중하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흔히 알듯이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물론 이 말은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근본적인 뜻은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 성이 들어 있어서 인간이 이 율법을 통해(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 율법(여기서는 신구약 전체를 의미합니다)을 통해(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발견하고 그 주님의 성품을 소원하고 목적하며 그 율법을 지켜나간다면 그 지킴으로 인해 그 사람은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그 율법이 더 이상 율법이 아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화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은혜적인 신앙이라는 말인데 성도가 성경을 따라 십일조이던 주일이던 구약식대로 지켰건 신약식대로 지켰건 이유를 불문하고 그 어떤 행동이나 활동을 한다 해도 그 속 중심이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성을 입기 위한 목적이 아닌 정신과 사상으로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는 성화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율법적 신앙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믿는 사람이 무엇을 하건 그것을 통해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어 천국을 주님처럼 마음껏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자가 되는 목적으로 하고, 또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사람은 은혜 안에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람이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 성을 입는 이치와 도리를 깨달아 그렇게 살고자 노력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은 그의 이성과 몸에 타락성적인 요소와 성분들이 남아 있어서 온전히 은혜의 차원으로 행하지 못하고 어느 부분에서 자원적 소원적이 아닌 억지로 행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은 율법신앙자가 아닌 율법성적인 사람이라고 분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그리스도성을 입는 은혜적 차원의 신앙정신과 사상과 이치와 도리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 그런 사람으로 온전히 만들어지지 못한 관계로 그리스도성을 입기 위한 목적으로 율법성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 대해 율법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들이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니 이것을 전제로 하고 이 글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닌 말로 십일조는 율법이니 하지 말라거나 주일성수는 율법이니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해서 모든 교인들이 그 주장을 받아들여 그대로 했다고 해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나 그 주장을 듣고 그대로 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성을 덧입지 못했다면 그렇게 한 효력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한 그것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어리석게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현재 율법적인 신앙자입니까, 율법성적인 신앙자입니까, 아니면 온전히 은혜 안에 거하는 신앙자입니까?  나의 신앙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궁극교회 홈페이지: http://any.to/gugg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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