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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죽음의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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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태화 교수

여름 날의 홍수처럼 죽음이 흘러넘치고 있다. 죽음은 삶 속에서 극히 경계되어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죽음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체험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영안실이나 북망산이 그 예다. 또 죽음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만나서는 안 되는 무언가 의미 있는 과정이다. 죽음이 동서양 모두 종교적 예식으로 승화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초월적 경험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삶의 의미마저 열대야 현상 속에서 짜증으로 희석되어가는 요즘,죽음이 너무 쉽게 다가온다. 멀리는 아프리카 지역에서,가까이는 북한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직면한 죽음이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은 우리에게 마치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는 서바이벌 게임처럼 죽음을 바라보게 한다. 미디어에서 체험하는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경악성에 무감각해지게 한다.

이쯤되면 죽음에 대한 경외감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는 길가던 여인을 살해한 일명 묻지마 살인을 벌인 일도 있고,물가 갯벌에서 놀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피서지를 오가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 또한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어떤 안전 대책으로 이런 죽음을 방지할 수 없었을까.

죽음은 게임으로도 실험으로도 체험되거나 대체되지 않는다. 죽음은 생의 진지한 한 부분이다. 그런데 여름에는 죽음이 전혀 다르게 포장된다. 바로 납량물로 선보이는 공포 영화에서다. 무더위를 날려주겠다는 일념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공포물들은 죽음을 상품화한다. 그런 영화에서 죽음은 한결같이 특정 목적을 위해 고정되어 있다. 공포감의 극대화가 그것이다. 인간 안에 내재한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켜 쾌감을 선사하겠다는 의지는 죽음의 진정성에 대한 성찰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는 죽음으로 향해 가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인간이 죽음을 성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은총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거기에 연약한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있다. 사고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방지하고 죽음을 유희의 대상으로 만드는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야 하겠다. 그리하여 죽음의 진정성을 회복하도록 하자.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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