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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늘을 주고 내일을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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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 나름대로의 문제는 항상 있었다. 그래서 그 문제들로 인해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문제 해결은 뒤로 미루어진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적인 아픔 때문에 제임스 가필드는 역사를 ‘풀리지 않는 예언의 두루마리’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내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시대에 물질과 첨단과학,예술은 있다. 그러나 내일이 없다.

내일이 없다는 말은 꿈이 없다는 뜻이다. 또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배고픔은 참으면 된다. 수치와 고통 역시 눈을 질끈 감고 인내하면 된다. 그러나 내일이 없음으로써 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그만큼 내일의 문제는 우리 생활에 크나큰 영역을 차지한다. 그래서 “오늘을 주고 내일을 사라”는 성 크리소스톰의 말은 큰 의미를 지닌다.

현실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미래는 무형의 자산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오늘을 보이지 않는 내일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내일을 꿈꾸지 않는 사람에게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씀한 것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갔던 것은 바로 그가 오늘보다 내일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태어난 자녀들이 걸음마를 못할 때 우려한다. 그 이유는 걷지 못한다는 것은 곧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걷는 법을 알면서도 걸어 가야 할 방향을 모를 때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 이유는 내일이 없는 삶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을 생각하기보다 내일을 생각하고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보다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거의 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지나온 과거와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만큼 사람들은 내일보다 어제와 오늘에 얽매어 산다. 문제는 그런 삶의 태도는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죽은 남편 이야기를 한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물질을 이야기한다고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과거나 현실에 얽매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유익하지 못하다.

예수는 과거에 얽매이거나 현실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내일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복음을 증거하시고 저 동네로 가셨으며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후 새로운 사역에 도전하셨다. 내일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거기에 항상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일의 세계 역시 고통도 있고 풀어야 할 숙제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의 세계로 날마다 나아가야 한다. 그 이유는 거기에 꿈이 있고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과거를 모두 잊었다. 나는 미래만 보고 있다”고 말했고 힐티 역시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라. 언제나 전방을 보라”고 했던 것이다.

발전을 원하는가? 부흥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처럼 오늘보다 내일에 관심을 가지라.


길자연 <왕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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