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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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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환 총장 (칼빈대학교)

지난 1994년 1월 17일 새벽 강도6.6으로 미국을 흔들었던 지진은 1년 후 같은 날 1월 17일 새벽, 일본 고베 지역에 강도 7.2로 덮쳐 와서 온 세인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었다. 금세기 들어 가장 큰 강진이었다고 한다.

그 피해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오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십만의 이재민을 낳았다. ‘날벼락’이란 표현 그대로 예상치 못한 재해로 인해 우리 주변에 갑자기 어려움을 당한 불행한 이웃을 많이 보게 됐다. 천재지변에서 오는 불행은 예수님 당시에도 일어났다. 또 인재지변에서 오는 불행이 있었다. 천재지변과 인재지변에서 오는 불행의 예가 누가복음 13장에 소개되어 있다.

첫번째 소개된 사건은 갈릴리인들의 유혈사건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폭군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을 죽여 그들이 흘린 피로 제사를 지냈다. 두번째 소개된 사건은 실로암에 세워진 망대탑이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은 불상사였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강한 지진 때문인 것으로 본다. 이렇게 폭군이나 지진으로 인해 생겨진 희생자들이 겪은 불행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더구나 잘 믿는 성도들이 당하는 불행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성도들도 이 세상의 일반적 불행에서 반드시 제외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야곱이 보낸 험한 세월이나 욥이 겪은 극한적인 시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거나 사랑하시지 않아 겪은 것은 아니다.

욥의 세 친구는 성도의 궁극적 축복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도의 시련이 주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단순한 상식적 인과법칙을 가지고 욥을 괴롭혔다. 그들은 그들의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해석했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에 말한 신앙고백적 해석을 믿음을 가지고 받을 뿐이다.

또,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을 로마로 호송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호는 심한 풍랑으로 파선됐다. 바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게 됐다. 다음 장에 보면 극적으로 바다에서 구조된 바울이 모닥불을 마련하려다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될 뻔한 사건이 나온다. 하필이면 왜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도록 하나님은 섭리하셨을까? 우리는 바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섭리의 퍼즐앞에서 성급한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 우리 이웃의 불행과 시련을 단순한 인과법칙을 적용하여 일괄적으로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보다 훌륭해서 재난에서 살아 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개에게까지 천대받은 극빈자 나사로를 하나님께서 버리셨다고 말할 수 없다. 호화스런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대조에서 오는 인생 해석에 대한 난제는 금생에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지만 내생에서 틀림없이 풀리리라.

우리는 바울이 뱀에 물려서 그 독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이 뱀에 물린 다음, 멜리데 섬은 복음화된다. 여기서 그는 고난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웃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회개를 도출하는 기회로 삼아야한다. 주님은 누가복음 13:3,5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거듭 회개를 강조했다. 우리는 역사의 현실을 방관자의 자세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더욱이 그 역사가 교훈성을 담은 사건일수록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 이를 회개와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청교도 지도자 벡스터(Richard Baxter)는 거리에서 불행한 자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빼버린 벡스터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별 수 없지 굶지, 오늘의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겠는가? 일본 고베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니 수십만이 넘는 이재민이 공원에서 학교에서 샤워도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지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발생하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비단 자연 재해뿐만이 아니다. 사회 환경이나 가정 환경의 희생자들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러한 이웃의 불행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을 살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하겠다.

주님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게 된 희생자들의 비극을 소개하신 다음, 포도원 비유(눅 13:8~9)로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권면하신다. 메시지의 핵심적 교훈이 여기에 있다. 포도원 사이사이에 무화과를 심은 주인은 열매를 기다려 찾았다. 그것도 3년이나 찾았다. 그러나 열매를 찾지 못하게 될 때 주인은 찍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농부가 간청을 한다. “한 해만 더 참으로서. 내가 거름을 주어 가꾸리라 만일 금년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 버리소서”라고 말이다.

우리는 오늘날 열매 없는 무화과가 자신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무화과 나뭇잎처럼 겉이 무성한가? 지극히 종교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는 나무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목재로서 쓰일 수도 없고 오직 열매를 맺을 때만이 존재 가치가 있는 나무이다. 나를 살리시고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와 나를 불행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섭리를 깨닫고 오직 열매 맺는 삶을 살지 않겠는가?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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