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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크리스천의 진정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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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하는 용기

때로 설교를 통해서 “남이 내게 지은 죄를 무조건 용서해야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용서가 어디 마음먹은대로 되는 일인가?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보는 순간 다시 상처와 유감이 되살아나는 이 아픈 마음을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주기도문을 외면서 “주여 내가 저를 용서했나이다”라고 기도했는데도 남아있는 상처를 내가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뭐 내가 도사가 다 돼서 “아이구 이 불쌍한 중생아!”하는 자세로 그를 대해야한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으나 주께서는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해야하는가? 그렇게 설교하는 당신은 실로 용서가 쉬워서 그렇게 자신있게 용서하라고 외쳐대는가? 아니 근본적으로 설교자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실행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셨는가? 우리는 때로 ”용서“를 소화하지 못하고 그렇게 고통하며 오늘을 산다.

공관복음에서 “용서한다(forgive)"라는 어휘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바로 다름 아닌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다[마6:9-13]. 주기도문이 말씀하는 “우리가 우리에게---”는 죄의 용서에 있어서 주께서 제시하신 용서의 대원칙이다.

주기도문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주께서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리고 말씀하셨다[마6:14-15]. 그런데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아무런 절차도 없이 무조건 용서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죄의 회계학적 개념상 모순이 있다.

어찌 회개의 절차 없이 빚을 감해 줄것이며, 어찌 채무자도 모르게 빚을 감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지상이겠으나, 상처가 크든 작든 그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포함하는 [마18:15-마지막절]은 사실상 용서의 대 원칙인 주기도문의 죄의 회계(會計)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무자비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았으면, 그에게 빚진 다른 종들을 불러다가 그들과 앉아서 그들의 빚을 확인한 다음 탕감해 주었어야 했다. 이 비유에 이어지는 말씀이 제시하는 주요한 원칙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이다. 성도가 성도에게 지은 죄는 성도들간에서 해결되어야한다는 원칙이다.

당사자 두사람간에 해지(解之)가 되지 않으면, 다음으로는 두세 사람의 증인의 절차가 따르고,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교회에 판단을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교회의 말에도 회개하지 않는 이는 세금징수원이나 이교도와 같이 간주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는 우리들이 말하는 용서의 주제를 믿는자들(형제들)간의 문제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세금징수원들과 이교도들)과의 문제로 분리하셨다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역시 주께서 직접하신 말씀으로 [눅17:3-4]도 주기도문의 죄의 회계과정을 설명한다. 이들 구절들에는 우선 꾸짖는 절차(rebuke)가 있다. 또한 “회개(悔改)”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다. 꾸짖음을 듣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회개하면 용서해야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는 회개(悔改)의 종교이다. 그 회개의 대상에는 하나님 뿐 아니고 내가 죄를 지어서 피해를 입힌 형제도 포함된다는 것이 주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다. 형제에게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이 아니고, 내가 죄를 지은 그 형제에게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게 죄지은 형제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에게 죄를 일깨워 주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 회계 절차를 거쳐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오만한 이들로 가득찬 오늘의 교회에서, 자기 의로 가득찬 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덕목은 속에 담아두지 말고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용기”와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혹은 용서하십시오”의 한마디 회개로 해결될 수 많은 문제들이 절교로, 분란으로, 분열로 이어지는 오늘의 한국 교회는 “형제에 대한 회개의 용기”로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설명하신 성도간의 죄의 회계(會計)과정은 [마5:23]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그러므로, 제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유감을 가질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남겨둘지라.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리니, 그리고 와서 그대의 제물을 드리라(NIV).

서로 꾸짖고 서로 회개하는 용기를 통해서 형제간의 죄를 상호 장부를 펼쳐 놓고 용서받고 용서해서 회계(會計)하고, 깨끗이 지워진 장부를 들고 개운하고 기쁜 마음으로 무릎꿇고 하나님 앞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나머지 하나님과 회계하여야 할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회계과정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라니요, 어디 그게 됩디까? 주께서는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힘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가 직접 가르치신 말씀을 통해서 죄의 회계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세상에 대한 용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간의 죄의 회계과정에 이어서 죄의 회계학상 형제가 아닌 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세금징수원들이나 이교도들(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죄의 용서에 관하여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 보자. 왜냐하면 우리의 주께서는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지셨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서신들에서도 믿는 형제들과 세상사람들을 구분해서 언급한 유사한 말씀이 발견된다:

내가 나의 편지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것은, 결코 이 세상의 부도덕한자나, 혹은 탐욕한자와 사기꾼이나, 혹은 우상 숭배자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니라. 그리하려면 그대들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리라[고전5:9-10](NIV).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으며 세상사람들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믿는 이가 이교도에게 죄를 지었다면 어찌해야 될 것인가? 이는 믿음의 상식으로 자명할 것이다. 형제에게와 같은 자세로 용서를 구해야 될 것이다. 그리하면 그 이교도는 용서를 구하는 크리스천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게되어 우리 주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구하는 용기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추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이들 세금징수원이나 이교도가 바로 우리가 피를 나눈 부모 형제일 수도 있고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는데 있다. 단 중요한 것은 [눅17:3-4]에서와 같이 그 잘못의 횟수가 반복되면 아니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죄도 잘 짓고 용서도 잘 구한다는 인식은 주의 빛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교도가 믿는이에게 지은 죄의 용서에 대한 대원칙은 우리의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기도가 될 것이다: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시리니, 이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옵니다[눅23:34](NIV). 이 대원칙하에서 생각할 때, 이교도가 믿는 자에게 죄를 지었을 때 믿는자가 할 일은 그의 죄가 용서받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가 죄를 용서받는 길은 물론 한가지 길 밖에는 없다. 주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다. 주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믿는자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믿음있는 자가 같은 자세를 가질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주께서는 십자가 처형 전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물론 믿는자도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깨우쳐 줄 필요와 그렇게 할 용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만일 그가 용서를 구한다면, 크리스천은 과감하게 용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버지께 그의 용서를 구하고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교도가 지은 죄는 그 이교도와 하나님 사이에서 회계되여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믿는자는 그 사람의 죄에 관한 장부는 하나님께 이첩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마18:17]에서 형제로서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세금징수원이나 이교도로 간주된 이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자명해진다. 그를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그의 죄는 하나님과 그 사이에 회계하여야 할 죄라는 것이다.

이로서 죄의 용서에 대한 결론을 내려보자.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무조건 용서할 수 있는 죄도 무조건 용서해야할 죄도 없다. 죄는 회계학적(會計學的)으로 용서되고 용서 받아야 한다. 믿는자들간의 죄의 용서에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원칙이 적용된다. 즉 사람간에 용서되고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자들에게는 “형제에게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와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가 성도간에 인지되고 수용된다면 교회는 더욱 화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자는 자신에게 지은 죄를 일깨워 주어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과 그들간에 회계할 문제이다.

형제에게 죄를 짓고도 그 형제에게 회개하지 않는 이는 이교도와 같이 간주되어야 한다. 그의 죄는 하나님과 그 사이에서 회계되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성도는 무조건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주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용서의 원칙과 과정은 우리의 교회와 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믿는자들의 용서에 대한 원칙들을 분명히 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무리한 “무조건 용서”를 강요하시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마이클 송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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