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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와 사회주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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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41] 
 
-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기독교는 개화의 물결을 타고 근대문화의 선구자로 인식되며 한국사회에 그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사회 전반에서 긍정적인 지위를 누려 왔다. 한국교회의 극단적 보수주의를 “정통의 폭군”으로 비판했던 이광수도 ‘서양 사정의 알림, 도덕의 진흥, 교육의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 조혼의 폐습 교정, 한글의 보급, 사상의 자극, 개성의 자각’ 등을 기독교가 한국에 준 선물로 평가할 정도였다.(청춘, 1917. 7) 하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이러한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양주삼은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민족의 일반적인 태도는 전일과 판이하다. 이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이다”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위치가 도전을 받게 되었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문화적 측면에서 보다 나은 설비를 갖춘 공립학교와 병원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이전 기독교가 수행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가 3.1운동 이후 급변하는 사회문제에 적극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한편에서는 자성 및 개혁에의 요구와,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 현실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비판의 목소리와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3.1운동을 전후해 국내에 도입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첨가되면서 한국교회는 큰 위협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세계 도처는 사회주의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이 구체제 붕괴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그 사상적 근간이 되었던 사회주의가 약소 민족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국주의를 허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국외에서 한인사회당(1918)이 조직된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많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창설되었다. 국내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1920) 결성을 필두로 1926년까지 3천3백80여 개의 사상단체가 조직될 정도로, 사회주의운동은 수많은 지식인들과 청년들을 매료시켰다. 여기에는 당시 유력한 신문 잡지들도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사회주의운동을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며 앞다투어 그 사상의 보급에 앞장섰던 것이다.

사회주의운동은 3.1운동 이후 한국사회에 크게 대두된 민족독립의 열망을 담은 민족운동과 기독교 비판세력을 발판으로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결국 민족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반종교운동으로 이어졌다. 국내의 반종교운동은 1922년 4월 북경에서 열렸던 반기독교운동의 소개로 태동되었다가,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계기로 공식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청년당대회는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싸고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민족문제 논쟁이 본격화된 시점에 열렸는데, 격론 끝에 종교의 존재 의의를 부인하기로 결의하고 반종교운동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반종교운동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전후해 더욱 급속히 고조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를 둘러싼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사실, 1920-30년대의 한국사회 및 교회는 에로티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전에 없는 사상적 혼란을 겪었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서울의 한 주요 신문의 편집장에 의하면 가장 유행하고 있는 두 단어는 ‘ero’와 ‘pro’이다. ‘ero’는 에로티시즘(eroticism)을 그리고 ‘pro’는 프롤레타리아니즘(proletarianism)을 대변한다. 그 편집자가 의미하는 것은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읽으려면 반드시 섹스어필과 마르크시즘의 가르침에 호소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져 있는 것 같다. 심지어 고등보통학교에서도 소년 소녀들이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한국교회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사회주의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 중에는 사회주의를 기독교와 결합시켜보려는 자들도 있었고, 실제로 사회주의자로 전향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초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거두였던 이동휘와 여운형은 평양신학교까지 다녔던 교회 전도사들이었다. 또한 1923년 <청년>에 실린 “기독교 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하다”는 YMCA지도자들의 논평은 당시 한국교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 당시 한국교회가 종교적인 면에 심취하여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신론 바탕을 둔 기독교와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함께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 공격은 혹독한 정도를 넘어 파괴적이었다. 그들은 “기독교는 제국주의자들의 영토 확장에 주축에 되고 자본주의 국가를 옹호하는데 무기”가 되기 때문에 “기독교를 파괴함이 곧 계급 해방”이고, “미신의 관념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외쳤다. 이에 그들은 국내외에서 예배 방해, 교회 방화, 구타는 물론 심지어 살해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이미 이때부터 자라고 있던 것이다.

1928년 간도 종성동교회에서 있었던 동아기독교(한국침례교의 뿌리) 김영진 목사와 김영국 감로의 순교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느 날 30여명의 공산당들이 난입하여 모든 지역민들을 종성동교회에 몰아넣고 신자와 불신자를 갈라 앉혔다. 그들은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예수 믿을 사람은 손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다그쳤다. 이때 주성범 집사 어머님을 필두로 모든 교인들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폭도들은 그들을 제지하고 교회의 책임자만 손을 들고 나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교인들의 간곡한 권유로 몸을 피했던 김 목사 형제는 교인들을 구타하며 다그치는 공산당들의 폭력에 더 이상 숨어 있지 못하고 나타났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지금이라도 믿지 않는다고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김 목사 형제는 오히려 간곡한 말로 그들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포악한 욕설과 함께 김 목사 형제를 결박하고 온몸에 매질을 가하였다. 결국 김 목사 형제는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의 최후를 맞게 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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