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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공감(共感)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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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돌멩이 5개로 하는 놀이, 공기돌 놀이를 즐겨 보던 어린 날, 그 작은 돌멩이 5개를 중심으로 아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모여들곤 했다.공기놀이를 하는 아이와 구경하는 아이, 그러나 놀이를 하는 아이나 구경을 하는 아이 모두 함께 안타까워도 하고 아쉬워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놀이에 열중하곤 했다.많은 세월이 흘러 다들 각각의 삶의 찾아 떠나버리고 거기 5개의 공기돌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작가 미상의 그림 한 점,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이란 화제를 펜으로써 써 놓았다.그런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시간이 거기서 머물고 있음을 보았다.아니 시간은 여전히 그 옛날로부터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는데,흘러간 시간의 강을 거슬러 보려는 큰 아이들, 훌쩍 나이 들어버린 그 옛날의 아이들이 세월이란 짐을 지고 소인국 사람들 마냥 힘겨이 걸어가고 있었다.

현대는 공감(共感:sympathy)이 부족한 시대라고들 말을 한다.그런데 어떤 공감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에 대한 공감인가, 아무와도 함께 하지 못해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는 격이란 말인가.그렇다면 사회적 동물이 아닌 것이다.한 해살이 풀꽃러럼 왔다가 가는 것으로 그가 살던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람이라면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요즘 들어 그렇게 풀꽃처럼 왔다 가는 좋은 것처럼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모든 게 귀찮다는 것이다.나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그러나 추스른다는 것이 어찌 혼자의 일이랴.결국 사람이란 무언가 자기 역할을 하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타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면 같이 슬퍼하듯이 타인과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을 공감이라고 한다.이 경우 다른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공감이라고 한다.이 경우 다른 사람이 먼저 어떤 감정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고, 그 감정의 표출을 상대가 보고 자신도 같은 감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감정을 관찰하지 않고 추측해 버리는 것은 공감일 수 없다.그런데 체험하고 있는 타인의 슬픔이나 기쁨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슬퍼지거나 기뻐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공감이 아닐 것이다.

결국 어떤 사람과 함께 슬퍼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사람과 같은 슬픈 체험을 하고 있을 필요가 있겠다.부모를 잃은 사람의 슬픔은 자신도 부모를 잃어 슬픈 체험을 한 사람에 의해 비로소 공감될 수 있듯이 어떤 감정에 대한 공감은 그 감정에 대한 선행체험이 필요조건인 것이다.그런데 공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축제마당엘 간 적이 있다.젊은이들 위주라 그들을 겨냥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음악이라기 보단 소음이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소리들을 들으며 한참을 적응해 보려고 애를 써봤으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우선 귀가 견디질 못했다.나중엔 머리가 거부하고 온 몸이 일제히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옆의 젊은이들은 신이 나서 즐기고 있었다.이게 그들과 함께 되지 않는 것, 세대차인가, 그러나 공감은 감정이 우선이다.정서적이다.현상에 대한 동의나 적응이라기보다 마음으로 와 닿는 것, 그렇게 마음, 느낌이 하나 되는 것이리라,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면서 나의 배려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해야만 한다.감정이입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현재의 감정체험이 전제가 되는 것은 감정이입이고, 타인의 감정체험을 전제로 해야 공감이니 곧 상대에 대한 전적 배려가 있어야 공감은 이뤄진다는 것이다.대인관계 뿐 아니라 일상 생활의 부부, 애인, 가족 친구,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공감을 얻어야 삶이 삶다워 질 수 있으리라.

사람이 사람을 거침없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죽음으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은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오히려 그 반대가 정상이었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부모를,자식을 , 아내를, 친구를 살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그것이 사람이었다.그것이 크게 나라를 위한 것이면 순국이었고, 종교를 위한 것이면 순교였다.그런데 '나'라는 게 뚝 떨어져 있으니 세상이 모두 적으로 보인 게다.그러니 온갖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그러나 아니다.세상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다.지나치게 나만을 생각하다 보니 생긴 것이다.'공감'을 회복해야 한다.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나를 온전히 열어 보이고, 누구에게든 다가갈 수 있게 나의 무장해제를 하고 그들과 같은 색깔이 되어야 한다.나의 보호색은 나를 가둘 뿐이다.상대의 색깔로 변해가야 한다.

공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한정되는, 내가 먼저 배려를 해 주어야만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인 것이다.공기돌 다섯 개로 하나가 될 수 있던 어린 날에 금방 눈물이 나고 금방 웃을 수 있었다.그게 공감이었다.금방 그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 최원현 수필가,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청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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