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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핍박의 그늘에서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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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

-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일제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매우 조직적이고 교묘했다. 한국교회를 민족운동 세력의 거점으로 지명한 일제는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강압적으로 탄압하는가 하면,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이나 포교규칙(1915)과 같은 법제정을 통해 한국교회의 근본정신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본조합교회나 불교 등에 대한 막대한 인적·재정적 지원을 통해 우회적으로 기독교를 억압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조선인의 행복과 번영을 꾀한다”라는 명목 하에 행해졌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열렬하게 호응했던 매국적 친일파들에게 당시 한국은 더 이상 한국인의 한국이 아니었다. 한국인은 그럴만한 힘도, 지식도, 그리고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잔혹한 만행에 치를 떨었던 노블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솔직하고 정의가 두텁고 두뇌가 우수한 민족”이었으며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동정과 사랑을 받는” 민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혹독한 한파가 몰아치는 고난의 폭풍 속에서도 한국인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우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참된 역량을 가진 한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한국인을 통해 온 세계가 성령의 따스한 온기에 덮일 것이라는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핍박의 그늘에서도 복음전파를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반드시 이루어 나가야할 일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교회 역사상 제일 큰 전도운동”이었던 ‘산업박람회 연합전도운동’(연합전도운동)이 이러한 상황에서 열렸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 서울에서 일한합방 5년을 자축하며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 산업박람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것으로 각 지방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 것이 확연했다. 이에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은 “이때야말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파악하고, 박람회 기간 동안에 “연합전도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박람회 장소 근처에 임시 대형건물을 세울 장소를 구입하고, 그해 8월에 공포된 <포교규칙>에 따라 정부에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일제는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움직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105인 사건’을 통해 실추된 자신들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자신들이 결코 기독교에 배타적이 아님을 가장하려는 제스처에서 이를 마지못해 허락했다.

하지만 연합전도관을 세우는 일은 처음에 그렇게 순조롭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연합전도관 설립 비용 2,500원과 전도캠페인 수행에 필요한 자금이 문제였다. 이에 선교사들은 기꺼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하고 본국에 “더할 나위 없는 전도의 좋은 기회”가 임박해 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연합전도관 건물을 세워야할 시기가 다가와도 자금은 전혀 도착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에 언더우드 박사는 “이 황금 같은 절호의 기회를 자금 부족으로 놓쳐서는 결코 안될 것”이라며 강하게 호소하고 자구책을 마련했다.

그 결과 한국인 교회에서 500원, 일본인 교회에서 500원, 외국 선교사들이 1,500원을 모아 2,500원의 예산을 채웠다. 불신자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데 인종과 민족 그리고 교파를 넘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연합전도관은 한국인을 위한 전도실, 전도홍보용 사진전시실, 일본인을 위한 전도실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조선인 전도집회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계속되었으며, 매일 예배가 평균 8-8회 열렸다. 각 전도집회가 끝나면 그 팀은 구도자들을 전도관 뒤꼍에 있는 응접실로 인도하여 다시 개별지도를 하였다. 이렇게 한 팀이 전도를 마치고 개별 지도를 할 때, 또 다른 팀이 전도관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하여 집회가 조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도홍보용 사진전시실에서는 매 2회씩 교회의 역사를 활동사진으로 상영하여 참석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또한 전도관 밖에서는 전도집회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개인 전도를 하였다. 이때 오가는 사람들에게 배포된 전도지만도 40만장에 이른다.

전도관의 전도집회는 각 교파별로 분담하여 주관했다. 50일 동안 진행된 전도집회는 북감리교 13일, 장로교와 남감리교가 각각 12일씩, 구세군과 대한기독교가 각각 5일씩, 동양선교회가 4일씩 맡았다. 그리고 조합교회가 5일, 대영성서공회 권서인이 1일을 분담하여 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연합전도집회에 참석한 사람의 수가 한국인 전도집회에 75,000여명, 활동사진관에 21,500명, 일본인 전도장에 5,000명이 참석하는 등 거의 10만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11,625명이 “신앙에 대한 문답”을 한 후 믿기로 작정하고 구도자로 등록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구도자들은 즉시 각 교회에 출석하였다. 즉 감리교가 인도할 때 결심했던 사람들은 감리교회에, 장로교가 인도할 때 결심했던 사람들은 장로교회에, 그리고 성결교회가 인도할 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성결장막(무교정교회)에 출석했다.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에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함께 했던 성결교회는 9월에 215명, 10월에 231명 등 모두 446명의 구도자를 얻었다. 한국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성결교회 입장에서는 큰 수확이었다.

그런데 구도자들 중에는 조선 각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고루 있었다. 따라서 각 교파는 이들을 각 지방의 교회들과 연결하여 이들에게 떨어진 복음의 씨가 말라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그 결실에 대해 어떤 기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구도자들의]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예배당으로 곧 통지하여 [이들을] 심방하기를 부탁했는데, 지방의 소식을 들은 즉 이같이 작정한 사람 중에 혹은 그 지방 목사를 먼저 심방하고 교회에 다니며, 혹은 자기가 사는 근처에는 교회가 없음으로 자기집을 예배당 처소로 정하여 전도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도 있도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핍박의 그늘에서도 예수 복음의 전파를 결코 멈출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환란과 억압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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