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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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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서울이수중앙교회) 

“불어라, 불어라 겨울 바람아, 은혜 모르는 인간에 비하면 너는 그렇게 차갑지 않구나!”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렇게도 차갑게 느껴지는 것인가? 부모님의 눈물겨운 헌신과 사랑에 배은망덕하는 불효자식들 때문이다. 스승과 벗, 동지들의 은혜에 등을 돌리는 배신자들 때문이다. 아내와 남편의 사랑하는 마음에 비수를 들어대는 행복 파괴자들 때문이다. 자기를 뽑아준 국민의 여망과 은혜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리고 국민을 실망시키는 정치인들로 이 땅은 얼어붙어 동토가 되어가고 있다. 은혜는 다 어디로 가버리고 이 땅에는 원망과 증오로 들끓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고들 한탄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이런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은 아니라 하더라도 감사해야 할 은혜를 외면해 버리고 감사한 마음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요즈음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시급한 개혁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나 자신의 마음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감사를 모르기는 예수님께서 사시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1-13)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이때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문둥병은 가장 추악한 병일 뿐만 아니라 천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둥병자가 당하는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파멸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 병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철저하게 단절시켜버리는 참혹한 질병이었다. 비록 내 사랑하는 가족일지라도 일단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 없이 가정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동구 밖으로 쫓겨나 동굴에 기거하면서 살았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은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들은 멀리 서서 주님의 은혜를 강청한다. 큰 목소리로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쳤다. 예수님은 이 딱한 모습을 보시고 견딜 수 없는 불타는 긍휼로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하셨다.

문둥병자가 몸이 깨끗하게 낫게 되면 제사장을 찾아가서 “내가 아무 때에 문둥병에 걸려 동네에서 쫓겨났으나 지금은 이렇게 나았나이다”하고 자기 몸을 보이면 제사장은 진단해보고 나은 것이 확인되면 완치되었다는 증서를 주었다. 그러면 이 증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보이고 고침을 받았다는 증서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런데 고쳐 주시지도 아니하시고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열 문둥이 중 어느 하나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떠났다.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나?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정말 믿고 떠날 수 있겠나? 병이 낫지 않았는데 말이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이런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날 수 없을 텐데, “아닙니다. 예수님, 고쳐주시지 않으면 여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나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이었다. 이들이 떠날 때는 여전히 문둥이였는데 한참 가다 보니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되어 있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랐더니 되더라, 희망이 생기더라. 기적이 일어나더라, 승리하게 되더라,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연약한 자가 강건하여지더라, 심각한 문제가 해결되더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더라” 이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도 이런 체험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병이 나은 열 문둥이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좋고, 기뻐서 펄떡펄떡 뛰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홉 문둥이는 제사장에게 뛰어가서 증서를 받아가지고 집에 가기 바빴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문둥이는 달랐다. 제사장에게 달려가 병 나은 증서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집으로 달려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일도 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병 나은 것을 보고 가장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 다음에 곧 바로 예수님께로 달려와 그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며 사례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단 말이냐?” (17:17-19)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이처럼 허탈감에 빠져 있는 쓸쓸한 주님의 모습을 본 일이 없다. 이처럼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허탈감과 좌절감을 안겨준다.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의욕과 용기를 한꺼번에 빼앗아 가버린다. 감사가 없는 세상, 살맛을 빼앗아가고 인생의 의미까지 파괴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무서운 죄는 없다.

반대로 감사하는 사람은 은혜를 더욱 넘치게 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고, 격려를 주고, 살맛 나는 인생을 만들어준다. 변변치 못한 부모 만나 고생하는 자녀들이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해 하지를 않나? 자식을 낳아 기르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된다.

가장 살맛 나게 하고 만족감을 주는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은혜가 넘치고, 사랑과 선행이 강한 세력을 얻게 된다. 기쁨과 보람이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감사는 기쁨과 행복의 샘이다. 감사는 삶의 활력소요 축복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감사만 있으면 광야에도 꽃이 피고 사막에도 샘이 솟게 된다.

그 아홉은 왜 주님께 감사를 못한 것인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일단 얻게 되면 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조금 전 바로 전의 일까지도 잃어버리고 만다. 볼일 보러 갈 때와 보고 난 후는 완전히 딴 사람이다. 그렇게도 다를 수가 없다. 이 아홉은 왜 주님을 찾아와 감사하지 못한 것인가?

병이 낫고 보니 옷이 더럽다고 느껴진다. 어떻게 빈손으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제사장에게 먼저 가야 한다. 이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에게 가도 되지 않겠는가?

모두가 그럴듯한 이유같이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에 전혀 딴 사람이 되어버린단 말이다. 병이 나았으니, 이제 아쉬울 것도, 급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돌변해 버린다.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 감사하지 않는 것은 정말 무서운 죄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 생명의 은인에게는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늘 차선의 가치를 좇다가 최선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 세상에 은혜에 대한 감사에 앞서는 선은 없다. 은혜에 감사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감사는 즉시 해야지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감사는 모든 덕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모든 덕의 아버지다”는 말을 했다. 그러므로 감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고, 감사하게 되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허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쌓아야 할 덕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 제일은 감사란 덕목인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이 이 감사라는 덕에서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감사하면 은혜가 넘치게 된다. 감사하지 않으면 은혜가 증발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마리아 문둥이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의 선언이었다. 병이 낫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온 문둥이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이방인이었다. 선택 받은 유대인은 병은 나았지만 감사를 못해서 구원에서 제외되어 버린다. 정말 비극이었다. 이처럼 큰 불행이 어디에 또 있겠나? 그러나 구원에서 제외되었던 이방인은 감사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선택 받은 자가 감사하지 못하고 버림받게 되었고, 버림받은 이방인이 감사하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하늘 나라 백성으로 살려고 한다면 항상 감사가 떠나서는 안 된다. 아홉 문둥이는 병든 몸을 고침 받고 떠났다. 그러나 병든 몸이 고쳐진 것을 감사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문둥이는 마음의 해방은 물론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다. 감사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 영혼의 병까지도 고쳐내는 명약이다. 우리에게 강건한 삶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감사의 정으로 넘치게 해서 그 감사가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해야 한다. 감사가 강이 되어 흐르는 그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욱 넘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감사가 넘치는 곳에 은혜도, 사랑도, 기쁨도, 삶의 보람과 용기도, 인생의 행복도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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