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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도가 덧입을 하나님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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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닮자' 라는 말에 이의를 달거나 거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는게 무엇이며, 어떻게 닮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장하는 바가 천차만별인 것이 교계의 현실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닮는 것일까’ 하는 이 문제에 대해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 정확한 기준을 알아보고자 한다.  참고로 본 메시지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교회 발행의 전도지 8호 ‘진리와 거짓(이단)에 대하여’를 먼저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닮는데 있어서 대 전제적으로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닮고자 하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바대로 정확히 알아서 안 그대로 내가 만들어져야 하나님을 바로 닮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는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형체(無形體)이시며 비시공간적(非時空間的)인 존재이심을 전제로 하고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의 어떤 외형이나 형체에 대해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가견적(可見的)으로 성경에 나타난 말이나 활동을 통해 그 분의 속성(屬性)을 알아야 한다는 답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는데 이것을 분류해 보면 절대적 속성(絶對的 屬性)과 상대적 속성(相對的 屬性)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一. 절대적 속성.(비 공유적 속성)
절대적 속성은 비 공유적 속성(非 共有的 屬性)이라고도 하는데 비 공유적 속성이란 인간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가질 수 없고 오직 조물주이신 하나님만이 홀로 가지고 계신 속성을 말한다. 
이 비 공유적 속성은 또 네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① 자존성(自存性)  ② 영원성(永遠性)  ③ 완전성(完全性)  ④ 단일성(單一性)이다.

① 자존성.
하나님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유출물이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체적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한 분이시다. 

② 영원성.
하나님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시는가?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이신 분이니 하나님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무시무종(無時無終)의 하나님이시다.

③ 완전성.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불변성(不變性)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에는 모순이 있다.  하나님의 완전성 속에는 절대성도 들어 있는데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지식과 인격의 성질적 완전을 말한다.  하나님에게는 자랄 것이라든지 부족한 것이라든지 더 보태질 것이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로는 시인을 하면서도 실제 신앙사상적으로나 삶에서의 적용에 있어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 영광을 위해’ 라고 할 때 인간이 그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드리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문제는 본 교회 발행의 전도지 10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를 참고하기 바란다.

④ 단일성.
앞에서 말한 완전성은 필연코 이 단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로 이 단일성에 대해 부인하거나 무식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 길이 없고, 바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구원과는(성화구원)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이 단일성을 제하면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한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룬다.(엡4:6)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마찰 충돌 대립성이 없다. 

二. 상대적 속성.(공유적 속성)
이상의 절대적 속성 밑에 상대적 속성이 있는데 이를 다른 말로는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이라고도 한다. 
이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의 인격성이라는 말인데 이 인격성이란 하나님의 활동성을 말하는게 아니고 활동성 이전의 인간의 용어나 지식으로 형언키 어려운, 마치 인간의 내적 어떤 정신적 느낌성, 즉 생존적 활동성(生存的 活動性)을 말하는 것이다.(요14:9) 
그렇다고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속성을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존적으로 가지신 속성, 즉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인격성이란 그의 판단 평가 쾌락 향락성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 속성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을 가진 우리 인간도 가질 수 있고, 닮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들이 이 속성을 갖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질적인 면에서는 같지만 양적인 면에서도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이 말이 ‘하나님에게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다’ 라는 말이기 보다 하나님 속성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는 말이다. 
이 공유적 속성에는 ① 지식  ② 지혜  ③ 선  ④ 사랑  ⑤ 거룩  ⑥ 진실  ⑦ 의(義)  ⑧ 주권(主權)의 여덟 가지가 있다.  이것을 다시 축소하면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있는데 지혜지식성에는 지식성과 지혜성이 있고, 도덕성에는 선 사랑 거룩 진실이 있고, 능력성에는 의와 주권이 있다. 

1. 지혜지식성.(지식성, 지혜성)
하나님의 예정 계획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온다. 

① 지식성.
이 지식성이란 하나님께서 과거와 현재를 정확히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 지식은 누구에게 배우거나 습득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 자체적(自體的) 자존적(自存的) 지식을 말한다.  물론 영원적 완전적 단일성적 지식도 된다. 
이 지식 외에 다른 모든 속성들(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도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인 자존성 영원성 완전성 단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지식을 인간이 가지면 과거와 현재를 정확히 알게 되어 과거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점검할 수가 있어서 현재의 자기를 바로 세울 수가 있다 

② 지혜성.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 지혜 역시 누구에게 배우거나 습득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당신 자체적(自體的) 자존적(自存的)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성에서 예정도 나왔다. 
하나님의 지식을 내가 가져 과거와 현재를 바로 알면 미래 역시 알 수 있고, 미래를 알 수 있으면 필연적으로 닥쳐올 사건을 알 수 있어서 이에 대처할 수 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바닷가에 서서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만 봐도 미리 겁을 먹고 도망을 가지만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파도를 타고 신나게 노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을 충만히 가지면 세상이 두려울 것이 없다.  세상의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오히려 그것을 자기의 이룰 구원거리로 잘 이용해 영적 수입을 본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늘 환경에 얽매이고 동화되어 살아가게 되니 이런 사람은 늘 원망불평일 수밖에 없다. 

2. 도덕성.(선성 애성 거룩성 진실성)
이 도덕성은 인적인 도덕성이 아닌 신적 도덕성을 말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니니 하나님 자체적 근원적(根源的) 발생적(發生的) 도덕성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를 위한 자위적(自慰的) 자애적(自愛的) 도덕이 아니고 상대를 위한 도덕성이다. 

③ 선성.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하는데 참 선은 단순히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가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다 유익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유익이 영원적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으로 천국에서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성이란 하나님 자신이 천국을 지배하고 누리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타 존재에게도 하게 해 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성이다.  이 선성에서 인류창조의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에게 선성이 없었더라면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 당신이 독존하고 계시던 그 천국을 보니 너무도 좋고 아름다워 혼자 누릴 수가 없어서 ‘이 좋은 천국을 누구에게 줄꼬’ 하는 이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게 된 것이다.  이 선의 실력으로 신령계를 누리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셨고, 성령님은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선이라 할 때 동사(動詞)인 경우에는 상대에게서 찾는 것이고, 동명사(動名詞)인 경우에는 자기가 자기에게도 선이 사용되는 것이다.  즉 선이란 하나님 당신이 신령계를 누리고 활동하고 다스리시는 그것이 자체적 유익이니 이것도 선이요, 이 유익을 상대에게 주어서 그 천국을 누리게 해 주는 것도 선이다.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질 수 있는 사건도 선(善事)이다.  이 일을 위해 시간 돈 정력 등이 쓰여지는 것도 선(善行)이며, 이 선의 효력은 천국에까지 영원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이라 하는데 나에게는 선(좋음)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럴 경우 인간 나의 것을 꺾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선(善心)이다. 
교회에서 영원과 상관없이, 신령계와 상관없이 현재적 육신적 임시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유익을 준 것을 선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나 선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선은 자타에게 영원히(천국에까지)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선하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지렁이나 뱀이나 송충이를 지어 놓고 ‘그 모양이 좋구나’ 라는 식의 물질에 대한 의미가 아니고(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지어 놓고 보실 때 우리 인간들이 그런 것들을 보고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생각했다는 의미는 아님) 인격자의 어떤 행위를 하게 된 그 행위의 성분, 즉 의사에서 그 말씀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 동기 목적이 당신의 택자를 구원해 천국에서 당신과 같은 차원으로 천국을 활용하고 통치하고 누리며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무나 무조건 그 천국에 데려다 놓는다고 되는게 아니라 그 천국을 누리고 다스릴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실력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 실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 세상이 아주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을 구원해 곧 바로 그 좋은 천국에 데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세기간 동안 하나님처럼 천국을 영원히 누리고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실력을 키우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고 이런 저런 사건을 몰아붙이시는 것이다. 
어떤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궁핍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 자체가 선이 아니고 세상에 매이고 물질에 매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자로 사상과 소원과 목적을 바꾸어 주는 것이 선이요, 바뀐 것이 선이다.  내가 선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타에게 선을 줄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선의 사람이 된 것만큼 선을 이웃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런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교회에서의 할 일이다. 

④ 애성(사랑).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애성에는 필연적으로 상대성이 있는 것인데 이 애성이 효력을 내기 위해서는 상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사랑은 임시적이고, 시간 따라 변하고, 물질이나 환경에 좌우되고, 길어야 100년 안팎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적으로 영원한(천국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사랑이요, 그 무엇에 의해 변질 변동되지 않는 사랑이다.  영원히 변질 변동되지 않고 천국에 가서까지 영원히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땅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웃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로 만드는 것은 참 사랑이다.  이 일을 위해 물질 시간 노력 등이 쓰여지는 것은 자기에게 영원히 유익된 효력을 주게 된다.  남녀간에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기본이 되어 사랑을 하게 되면 참 사랑이다. 
하나님의 구원의사가 이 애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세계(意志 世界)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시간적으로는 영원 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애성의 대상자로 삼으신 것이다.  교회에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하는 곳이다.  ‘사랑’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교회 발행의 전도지 7호를 참고하기 바란다.

⑤ 거룩성.
거룩이란 구별(명사적으로)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거룩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聖性)이 아니고 자체적 능력적 구별이다.  누가 구별을 해 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구별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 그 누가 하나님의 성품이나 도덕성을 혼잡시키거나 혼돈하도록 만든다 해도 하나님은 혼돈도 혼잡도 되지 않는 자체적 완전적 구별성을 가졌다. 
하나님은 물질과도 비물질과도 자체적으로 구별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성은 감염성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을 입을 수는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고 하신 것이다. 
나 스스로도 하나님의 거룩으로 구별하고 나가면 내가 나를 구별할 수가 있다.  유사성이나 비슷한 것이 없이 완전 구별이 된다.  비슷한 것을 구별할 줄 모르면 내 속에 나쁜 것이 숨어 들어온다.  구별을 해야만 거룩(진짜)이 나온다. 
자기의 인격과 상대의 인격을 구별해야 한다.(비판과 구별은 다른 것임)  정확한 구별을 하려면 옳은 교훈(진리교훈)을 받아야 하고, 옳은 교훈을 받으면 옳은 지식을 소유할 수가 있고, 옳은 지식을 가져야 바른 양심이 된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이 옳아야 내 마음이 나의 몸을 하나님의 옳은 쪽으로 움직이게 해 나의 이성과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과 성품을 덧입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옳은 것을 덧입으면 영원히 변질이 안 되고 천국에서도 그 거룩을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그 거룩의 나라에서 살게 하려고 거룩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영적이요 신령적이요 영원적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라는 말이다.  내가 그 진리를 바로 알고 그 진리로 자체화 되어야만 거룩해 질 수가 있다. 

⑥ 진실성.
하나님의 진실이란 참이라는 말인데 절대 정확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진실이란 진리로 자체화 되어 활동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실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니 독단적 자체적 가치적 영원적 진실이다.  어느 시대 어느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이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다 죄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이시기에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 그 자체이시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처사가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적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인 면에 가서 보면 진실로 판명이 난다.  하나님의 진실은 의는 의대로, 불의는 불의대로, 진(眞)은 진대로, 가(假)는 가대로 정확한 결과성을 가져오게 한다.  참은 영원히 행복이고, 영원히 영광이고, 불변의 권위성이 있는 것이다. 
불변성보다 진실이 더 힘이 있다.  마귀는 마귀로서 변치 않는다.  이런 면에서 마귀도 불변성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옳은 것, 참된 것, 좋은 것, 존영적인 것, 행복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집사가 담배 피우는 것을 다른 교인이 보고 소문을 퍼뜨린다면 그 말은 참이지만 그 사람을 유익되게 해 주려고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은 아니다.  그 말을 한 자나, 담배를 피운 자나, 그 말을 듣는 자나 유익은 없고 해가 되니 진실이 아니다.  영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말, 또 그 말을 옳긴 것은 그 사람의 진실된 정신이 아닌 거짓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사실대로 말을 했다 하더라도 진실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영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한 번도 말을 안 했다면 그것도 진실인가?  아니다.  진실이란 용어는 말을 하고 안 하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이 진실이다.  설교를 할 때 영의 유익이 아닌 육에 이익이 되는 말이라면 아무리 성경을 근거로 말을 한다고 해도 진실된 말은 아니다. 
성경을 보면 아주 엄격하다.  ‘설교가 영적이냐, 육적이냐’에 대해 아주 엄격하다.  설교를 육적으로 먹이면 이건 영적 살인죄를 짓는 것이다.  이에 따른 심판이 매우 크다.  그런데 교회라는 것을 동네에서 아이들이 모여 노는 놀이터 정도로 생각해 아무 교회나 가서 분위기 좋게 지내면 ‘이게 예수 믿는 거려니’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데는 하나님의 심판이 붙어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르치는 면이나 듣는 면의 중요성을 모르는 결과이다. 
진실은 모든 동작을 타에게 영원히 유익되게 하려는 진리의 정신에서 나온 활동이다.  이 진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진실이다.  하나님의 진실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이력도 모두가 자기에게 있어서 앙화요 고통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요 사망거리이다. 

3. 능력성.(의성, 주권성)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다. 
이 능력이란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모든 것을 이기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단일성(單一性)으로 되지 않은 것을 정죄할 수 있는 능력이다.

⑦ 의(義).
의란 우리말로는 옳은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본질에 맞는 것, 옳은 것이 아닌 그 모든 것은 거짓된 데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가지고 사회적인 어떤 좋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사랑하고 쓰다듬고 업어주고 하는 이런 말을 일반사회적 개념으로 했다면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틀린 말이 된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 각자의 기준에 맞추면 각자가 다 틀린다.  하나님의 옳은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게 모두 정죄가 된다.  인간 누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당신이 틀렸소’ 라고 할 자가 없다.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 근원적 기준적 의(義)이므로 이 기준에 맞는 것은 칭의(稱義)가 된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옳은 것을 많이 가지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시험문제를 채점할 때 채점하는 사람은 답을 알기 때문에 시험지에 쓴 답이 정답에서 틀리면 / 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의(옳음)를 알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옳은 것을 선택할 수가 있다.  이게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천국에까지 가지고 가서 영원히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는 것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지혜지식과 인격과 성품을 덧입었다고 하는 것이다. 

⑧ 주권성(심판성).
하나님의 주권은 자체적 능동적 능력으로써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이다.  그 어떤 요인이나 원인에 의해서도 침해를 받음이 없다.  내가 하나님의 이 주권성을 가지면 세상 그 어떤 풍파가 나를 넘어뜨리려 해도 능히 이기고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이 주권은 의(옳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구별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진다.(고전6:2, 계12:5)  그래서 옳은 것을 가지면 힘이 있다. 
의는 진실에서 나오고, 진실은 또한 거룩에서 나온다.  그리고 거룩은 또한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은 또한......에서 나온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속성 하나 하나가 전부 연결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표현으로 설명을 하려니 앞에서 나눈 것처럼 이론적 논리적으로 12속성으로 나눈 것이지 에스겔서에 나오는 생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다른 모든 생물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속성이 움직일 때 어느 한 속성만이 움직인다거나, 각 속성이 별개로 움직이는게 아니고 모두가 연결 연관이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무한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유한된 인간의 지식과 용어로 설명을 하려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우리가 덧입을 때 하나님의 8대 속성 중 그 어느 것 하나만을 입고 다른 속성들은 안 입고 하는게 아니라 어느 한 속성을 입으면 다른 속성도 같은 비율로 입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10%를 입었으면 다른 7대 상대적 속성(공유적 속성)도 각 속성대로 똑같이 10%씩 입어지는 것이지 각 속성이 입어지는 양이 각기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가견적 사역적인 면에서 어느 한 속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뿐이다.
이 하나님의 속성은 순전히 인격적이요 불가견적이요 영적이요 신령적이요 천국적이요 영원적인 것이지 유형적 물질적 육신적 세상적 임시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닮으라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닮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인격과 성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절대 정확한 기준을 먼저 제시해 놓고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이라면 우리 인간은 모형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이라면 우리 인간은 이질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이라면 우리 인간은 불완전이다.(그러나 인간은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완전이다) 
원형이시요 본질이시요 완전이신 이 주님께서 만드시고 인격적으로 누리고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천국이 바로 우리가 가서 거할 곳이기에 그 곳에 갈 우리가 그 곳을 주님처럼 누리고 다스리고 통치하며 주님처럼 만족해 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그 실력이 바로 이상에서 말한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속성을 입기 위해서 먼저는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알고, 그 다음에 인간 내 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모두가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것은 모두 버리고 그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때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만 인격성과 감염성을 넣어 주셨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쾌락하게 살 수 있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특별도모 하에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바로 이 인격성과 감염성을 주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죽은 영을 살려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하고,(이것은 기본구원) 이것이 전제가 된 상태에서 옳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른 양심을 가지고(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음) 그 바른 양심에 따라 나의 마음과 몸이 움직여 나가면 나의 이성과 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속성이 나에게 감염되는 것이다.(이것은 성화구원)
이 성화구원은 마치 영어선생과 가까이 지내면 영어실력이 늘고, 춤추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춤추는 실력이 느는 것처럼 중생한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그 하나님 말씀의 뜻을 잡고 그 뜻을 좇아 이성과 몸을 움직여 나가면 내 속이 점점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인격적이요 비물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설교를 하건, 성경공부를 하건 무슨 활동을 하건 그 주 목적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기 위한 것이 되어야지 눈에 보이는 어떤 활동이나 방편 자체로 믿음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닮은 여부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상의 글을 통해 교회란 무엇이며, 성도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를 바로 알아 자신의 궁극적 미래를 바로 준비하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ㅂ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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