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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참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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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가는 말 중에 하나가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의 입에서만이 아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많이 사용하는 말 역시 사랑일 것입니다.  그 만큼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개념이나 사상들은 비록 용어는 일반사람들이 쓰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그 뜻에 있어서는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개념과 성경이 말하는 개념과는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고, 같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전학적인 면으로 성경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교회에서 일반사람들이 쓰는 개념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느라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라 할 때,
① 스톨게 사랑: 가족적, 동족적인 사랑.
② 필레오 사랑: 친구나 우애적인 사랑.
③ 에로스 사랑: 이성적, 정적인 사랑.
④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데 여기서 ①②③의 사랑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사랑인데 이 사랑은 시간 따라, 사건 따라 변질되는 임시적인 사랑입니다.<인조(人造)사랑> 그러나 ④의 사랑은 인간이 태어날 때는 물론이고 태어난 후에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랑인데(세상에는 없는 사랑이므로) 이 사랑은 세상에 있는 사랑과는 달리 그 효력성이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천국에 가서까지도 절대로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신조(神造)사랑> 
이 신조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받아 가지게 되고, 받은 이 사랑을 기본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깨달아지고 성화(聖化)되느니 만큼 충만해지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인조사랑과 신조사랑은 엄연히 구별이 되고, 그 가치 면에서나 효력 면에서나 능력 면에서나 결과 면에서나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것임에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거나 실천할 때 신조사랑이 아닌 인조사랑으로 하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조사랑을 하면서도 예수 이름으로, 그것도 교회에서 하기 때문에 제대로 구별을 못하는 결과인 줄 압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ἀϒὰπη)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공적인 사역을 하실 때 굶주린 자에게 떡도 먹여 주시고 병자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제자도 삼으시고 하셨는데 이렇게 하신 모든 일들의 효력성이 단순히 이 땅에서만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하셨을까요? 
진리는 영원한 것이고,(천국에까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인데 주님 당신 스스로가 나는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신이 존재적으로만이 진리가 아니라 그 행하신 모든 일들도 진리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의 그 목적이 단순히 굶주림과 질병과 무지와 죽음에서 헤매는 인생들이 불쌍해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이 땅에 사는 동안 편안히 누리며 살라는 목적으로 그런 일들을 행하신 것일까요?  아니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 목적으로 한 일들은 진리일 수가 없으며, 이렇게 되면 주님 당신 스스로가 비 진리적인 일을 한 것이 되니 주님께서는 진리일 수가 없고, 그러니 우리의 구주(救主)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단순히 굶주린 자의 주린 배를 채워 줄 목적으로 떡을 먹여준 것이라면 그 떡을 받아먹은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니 더 나아가 천국에 가서까지 다시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하고, 또 다시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터인데(진리는 영원한 것이니까) 그렇지를 않지요?  또한 육신에 병든 자를 고치실 때 그 병을 고쳐서 건강하게 해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다시는 아무 병도 걸리지 않아야 하고, 죽지도 않아야 하고, 그 몸을 가지고 천국에까지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텐데 그렇지를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진리이신 주님이 진리적으로 행하신 일일진대 육신의 그 병을 고치는 것 자체가 원 목적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것인데 그 구원이란 곧 영생입니다.(요3:16)  이 구원의 방편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역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여러 이적이나 능력이나 표적들을 행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기본구원 및 성화구원) 하는데 있고, 모든 사역은 그 목적성취를 위해 방편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즉 구원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견적(可見的), 불가견적(不可見的)인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발작에서 나온 것인데 이 사랑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요, 사람을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고,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런 저런 사건 환경을 겪게 해 이 사랑을 충만히 덧입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이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히 살리는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의미하는 이 아가페(ἀϒὰπη)는 그 어원(語源)을 모른다고 합니다.  즉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뜻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일반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하여 이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을 했네’ 하며 위안제를 마시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염성입니다.  이 감염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성분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듣고 깨달을 수록 하나님의 성품이 감염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영어선생을 가까이 하면 영어가 배워지고, 술주정꾼과 함께 있으면 술 먹는 것이 배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은 이런 감염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가 방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나 달란트나 재능이나 물질 등으로 이웃에게 행하고 베풀되 그 목적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의 마음과 정신으로 타에게 행한다면 행한 나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이 하나님의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을 타가 받아들인다면 받아들인 그 사람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앞에서 말한 ①②③의 인조사랑을 가지고 아무리 실천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이요 임시적이요 육신적이기 때문에 자타가 하나님을 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종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제 아무리 큰 일을 이루어 놓았어도 자기가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의 사람으로 성품이 바꾸어지지 못했으면 못한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하면 헛 사랑을 실천했다는 말이며,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이런 사랑을 실천했다고 해도 훗날 주님 앞에 설 때는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하는 선언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지옥 간다는 의미가 아님-마7:21~23) 
마지막 그 날에는 각종 은사와 직분은 다 버리고 오직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으로 성장되고 충만히 만들어진 것만 가지고 가게 됩니다.  왜?  천국은 아가페(ἀϒὰπη) 사랑만 들어가고, 그 사랑으로만 누리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더 큰 은사, 곧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을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12:31~13:8)

우리가 전도를 해도, 헌금을 해도, 예배를 드려도, 학교공부를 해도, 직장 일을 해도, 밥을 짓고 빨래를 해도 모든 것을 구원목적으로 행하고, 또한 자타를 살리되 영원히 살리기 위한(천국에까지도 효력성이 있는) 목적으로 행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 사랑을 하면 할 수록 내 속이 주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닮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 정복되는 사람은 정복되느니 만큼 그 사람 역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이 닮아지는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인 예로 들어보면, 이웃에 쌀이 없어 굶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에게 쌀 한 말을 팔아다 주었는데 쌀을 가져다주는 목적이 그 사람이 이 쌀을 먹고 힘을 내서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많이 벌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목적으로 쌀을 팔아 주었다면 일반적으로는 선이라, 사랑이라 하겠으나 여기에는 구원이 빠졌으므로 선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한 것인데(고전13:8, 13) 그 사람이 그 쌀로 밥을 지어먹는다 해도 다시 또 배가 고프게 되고, 그 쌀이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고, 그 쌀을 먹은 그 사람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므로 쌀을 팔아다 준 그 사랑은 효력 면에서 영원히(천국에까지) 가지 못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쌀을 한 말 팔아다 준다고 할 때 행동 면으로는 앞에서 말한 예와 다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속 목적은 굶주린 그 사람이 이 쌀로 밥을 지어먹고 힘을 얻어 교회에 나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말씀을 배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방편적인 면에서 이웃에게 쌀을 한 말 팔아다 주었다면 이 행동에는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것이 들어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이요, 이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실천한 그 만큼 주님을 닮는 것이고, 굶주린 그 사람이 이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 역시도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모든 일을 할 때 목적관을 바로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모든 수고와 공력이 마지막 그 날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부끄러운 구원, 불탈구원을 얻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말세에는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교회 밖을 향해 하는 말씀이 아니고 교회 안을 향해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마다 고아원, 소년 소녀가장, 장애인단체, 불우노인 등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 얼마나 많이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느라고 아우성입니까?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민주화 투쟁도 하고, 정의사회구현도 부르짖고, 공해추방운동도 하고, 도덕성 회복운동도 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에 기름을 부어 분신을 하면서까지 주님의 숭고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글자대로 본다면 말세인 현 시대의 교회가 어찌 사랑이 식어졌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말세에는 인조사랑은 많되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이 하나님의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은 적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외면한 채 방편만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건, 사랑을 실천하건 그 방편을 통해 자타가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지고 영생이 얻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입어진 것만이 그 효력성이 영원한(천국에 가서까지도) 것이니까요. 

현 시대의 교회는 방편이 목적이 되어 행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저 ‘예수 이름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라고 하기만 하면 다 주님의 일로 알고 도무지 분별을 않고 아무 곳에나 가서 피를 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의 법궤가 있는 곳에 가서 피를 뿌리지 않는 것은 모두다 개죽음일 뿐입니다. 
봉사고 충성이고 전도고 교회건축이고 일상생활이고 간에 법궤, 즉 말씀 앞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은 모두 다 헛 피뿌림입니다.  말씀 앞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또한 영원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란 앞에서 말한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하나님의 아가페(ἀϒὰπη)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 사랑은 영원한 효력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계의 흐름을 잘 보고 분명한 목적관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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