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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사적 안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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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나는 처음에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알지도 못했다. 고등학생 때는 수학과 물리와 영어와 체육을 좋아했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학년 때 택한 국사 동양사 서양사 개론 과목들의 성적이 모두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였다. 3, 4학년 때부터 역사과목의 성적이 A 정도 되었고 서양사 분야의 졸업논문 성적을 우수하게 받았으나 역사의 중요성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특히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삶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 절대로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 역사적 안목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과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분별하고 습득하는 세 가지 척도와 자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과 역사적 안목이다.”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한 랄프 윈터 교수는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책 제1권이라고 했고 교회사를 하나님의 책 제2권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귀중한 교훈을 나에게 가르쳐 준 분들이 있다. 내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의 진로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세 분 목사님들을 찾아 뵌 일이 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에서 무슨 과목을 전공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는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경직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명신홍 목사님을 찾아 뵈었다.

세 분 목사님은 역사나 철학이나 영문학을 전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결국 나는 역사를 전공하기로 결정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서양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그 후 계속해서 나에게 역사적 안목을 지니도록 가르쳐주신 분들 중에는 한철하 박사님 펠리칸 박사님 베인톤 박사님 등이 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나는 여전히 역사를 전공할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바로 인식하며 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창의적이고 모험적이고 헌신적인 봉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지금도 역사를 공부하라고 권면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

역사란 무엇인가? 첫째, 역사란 과거에 (자연계와 인간계에) 일어난 사건들(facts)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예:랑케).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데 있다”고 말한다.

둘째,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interpretation)이라는 견해가 있다(예:콜링우드).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역사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그의 마음 속에 과거의 역사를 재연하는 것(reenactment)이라고 말한다.

셋째,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기술함과 아울러 그것을 오늘의 삶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예:이 에치 카르). 즉 역사는 사건과 해석을 포함하며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견해이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붙잡는 것이 역사라는 견해이다.

우리는 위의 세 번째 견해(이 에치 카르의)를 따라,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고 정의한다.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가 역사요 역사적 안목이다.

과거의 역사는 나와 상관이 없는 역사가 아니다. 오늘 내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이미 과거의 역사가 먼저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나의 문제와 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그들은 내가 당면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했는가” 라는 진지한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오늘 나의 위치와 문제를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오늘의 현실을 바로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며, 내일을 향한 보다 풍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

역사란 과거와의 끊임 없는 만남과 대화인 동시에 미래와의 끈임 없는 만남과 대화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미래 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알파의 포인트와 오메가의 포인트를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미래 지향적 역사관을 보여주었고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과 쿨만이 미래 지향적 역사관을 수립했다. 현재와 미래와의 끊임없는 연계를 유지할 때 오늘을 승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터득하게 된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총화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초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의 모습을 나 밖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점에 서서 내려다 보는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의사가 잠시 동안 죽음을 경험하고 소생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들이 죽은 후 공중에 떠서 자기의 죽은 몸들을 내려다 보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터널 같은 것을 통과해서 어느 곳에 이르렀다가 다시 돌아와서 살아났다고 증언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밖에서 자기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 보는 초연의 안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멀리 종말론적 오메가 포인트에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 나아가는 구속사의 과정과 방편들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그 사건들의 의미는 크고 분명해진다.

특히 오늘의 내가 구속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될 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의미와 용기와 기쁨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나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멸시와 박해도 나를 도무지 불쾌하게 만들지도 낙심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역사 창조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안목을 지닌 신앙의 사람들을 성경은 묘사하기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히11:37).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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