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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16> 한국팀-북한팀-조선족팀 하나 돼 평양과기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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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기대 캠퍼스 설계는 영종도 인천공항을 설계했던 정림건축이 맡았다. 이 회사 김정철(작고) 회장은 14억원의 설계비를 전액 무상 지원했다.

건설은 조선족 기업 천우건설이 맡기로 했는데 북측이 공사 2주 전에 입국을 막았다. 군부에도 공병대가 있고 평양에도 건축팀이 있는데 왜 조선족 업체냐는 이유였다. 북한이 내세운 회사는 평양건축공사였다. 그 후 공사가 시작됐으나 진척 없이 1년을 허비하고 말았다. 상부에 보고한 다음 재협상을 거쳐 조선족 업체로는 2위권인 항달유한회사가 공사에 참여했다.

건축공사엔 북한의 청년돌격대가 참여했다. 19∼25세 남녀 800명 정도가 공사장 막사에 들어와 인부로 일했다. 조선족 기술자들이 벽돌 쌓고 거푸집 대는 기술을 하나씩 가르치면서 일을 시켰다. 나는 평양에 갈 때마다 청년돌격대가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의무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도 기술을 배우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고 돈을 벌고 출세할 수 있다.”

내 말에 자극됐는지 대원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기술을 배웠다. 조선족 기술자들이 그들을 지도했다. 이들의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북한 관리자들과 건축회사를 만들자는 의논까지 했다.

대원들은 황토에 시멘트를 섞어 만든 친환경 벽돌도 생산했다. 후원자로 참여했던 사업가 한 분은 목재 가공하는 솜씨가 좋은 대원들을 모아 가구공장을 세우고 학교에 필요한 책걸상과 교탁 탁자를 공급했다. 나중에 북한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공급하는 가구공장을 세우자면서 가구 기술자를 양성했다.

현장에서는 한국팀, 북한팀, 조선족팀이 모여 회의하고 일하고 식사하면서 하나 되는 경험을 나눴다. 정치, 이념, 법제도, 핵문제 등 체제에 관련된 사항을 언급할 수 없었지만 일상생활과 건축 작업에 관계된 일에 대해 편하게 대화했다.

평양에 갈 때마다 평양 시내 백화점이나 김책공대, 김일성종합대, ‘정주영 농구장’ 같은 대형 시설을 견학했다. 일요일엔 평양 봉수교회나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의 고향에 세운 칠골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자기 민족을 버릴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민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진 못했지만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재단 측에서는 평양과기대를 지을 때 모든 건물을 연결동으로 이어서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배려했다. 옌볜과기대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겨울에 기온이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니 동간(棟間) 이동이 힘들어 옌볜과기대 건물들은 연결동으로 이어졌다. 연결동 공사가 전체 공사비의 15%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지만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연결동 통로를 활용해 조선족 문화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을 체감했다. 연결동이 교수나 학생 또는 방문객들 간의 만남의 통로로 사용됐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추위를 막는 것보다 더 큰 정신적 소통의 가치를 배운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교훈을 그대로 살려 평양과기대에도 적용했다. 일부러 건물을 띄엄띄엄 지었다. 북한 당국에서 제공해준 학교 부지를 최대한 넓게 사용하려고 의도한 것이었는데 연결동 구간 거리가 길어지면서 예산 규모도 자못 커졌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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