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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홍렬 <10> 따뜻한 신앙 선배였던 구봉서 선생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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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막둥이 구봉서입니다.”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내가 존경하는 코미디언 고 구봉서 선생님이 남긴 유행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구 선생님은 한국 코미디계의 살아 있는 역사 같은 분이셨다. 구 선생님은 코미디언뿐 아니라 영화배우로도 눈부신 활약을 하셨다. 1963년 개봉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죽기 직전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라고 한 말이 명대사로 회자됐다.

나는 이런 구 선생님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흠모하면서 코미디언이 되려는 꿈을 품었다. 어린 시절에는 보기만 해도 즐겁고 신났는데 막상 후배가 되고 나니 지레 주눅이 들었다. 스물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대선배라는 인식 때문에 가끔 얼굴을 마주칠라치면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어렵기만 했던 구봉서 선생님이 나를 다정하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뜻밖의 계기를 통해서였다. 나는 평소 상가 방문을 거른 적이 없었다. 구 선생님을 상가에서 자주 뵈자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인사를 받으시다가 점차 살갑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마 “저놈이 그래도 궂은일 피하지 않고 자주 찾아다니는구나” 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구 선생님은 개그맨 신우회를 이끄시기도 했다. 신앙 선배 역할을 하면서 부족한 후배들을 잘 챙기셨다. 동료끼리 티격태격하면 불러서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다독이셨고, 내가 일본 유학을 떠날 때는 열심히 하고 오라고 기도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91년, ‘한국에 다시 돌아가면 잘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보내오는 글과 편지는 큰 위로가 됐다. 이때 문득 구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메일도 없던 그 시절 나는 손편지로 안부 인사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무려 5장에 걸쳐 답장을 보내주셨다. 지금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이 편지를 귀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뻘 같은 나이 차이가 난 덕에 선생님과 가까워진 다음에는 재롱을 많이 부렸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안아달라고 떼를 썼고, 그때마다 “저눔은 하는 짓이 구여워어∼”라고 웃으며 말하곤 하셨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일이 있다. 1989년 큰아이 첫돌 때 일이다. 많은 선후배들로 집이 북적이는 가운데 누군가 구봉서 선생님이 밖에 오셨다고 말해줬다. 선생님을 맞이하러 달려갔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금반지 하나를 건네신 뒤 엘리베이터로 향하셨다. “축하한다. 나는 어디 들러야 해서 갈게. 잘들 놀아라.”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이때의 일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후배들이 편하게 있다가 가라고 배려해주신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설날 아침에 찾아뵀을 때도 선생님은 고령이라 보청기를 끼신 채로도 끊임없이 유머를 선보이셨다. “야∼ 선생님 보청기가 크네요”라고 한마디 건네자 “홍렬아, 이거 아주 잘 들려. 모기들 얘기하는 것까지 들려”라며 너스레를 떠셨다.

선생님은 90세까지 살다가 2016년 8월 천국으로 가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어려웠던 시절, 웃음으로 국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셨던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구자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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