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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예배 365-3월 6일] 나는 샤론의 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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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14장(통 511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아가 2장 1∼3절

말씀 : 살면서 때때로 갖는 의문이 있습니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하는 이 일에 어떤 목적이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곧 소명에 관한 것입니다. 아가서 1장에서 “주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던 신부는 2장에서 “내가 왜 여기에 있지”하고 질문합니다.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의 초라함과 작고 연약함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소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은 부름을 받은 소명의 자리요, 주께서 나를 보내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신부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는 수선화입니다”, “나는 백합화입니다”라는 시적 고백은 “나는 주님에게 사랑받는 존재랍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수식어가 붙습니다. ‘샤론(평야)’입니다. 샤론 평야는 갈릴리 호수보다 두 배나 넓습니다. 아주 넓은 곳에 있는 아주 작은 한 송이 꽃을 생각해보십시오. 넓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아주 작은 나의 존재 같습니다. 이어 나오는 골짜기는 복수형입니다. 산속 골짜기 틈에 홀로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는 눈에 띄지 않는 미미한 존재임을 표현하는 고백입니다.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존재임을 확인한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샤론 평야처럼 넓은 세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하는 의문이 담긴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지만, 때때로 거대한 세상 속에서 작고 작은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외로워하며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나의 안목을 버리고 주님의 안목을 갖게 됩니다. 2절에는 골짜기와 샤론 대신 다른 수식어가 등장합니다. 나는 샤론 평야 속에서 나의 작고 초라함을 보았는데, 주님은 가시나무를 보게 하시고 소명을 깨닫게 하십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속의 백합화 같도다.” 내 사랑을 둘러싼 사람들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십니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주님의 신부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가시나무를 열매 없는 나무로 비유하십니다(마 7:16). 신부는 넓은 세상과 작은 나를 비교하지만, 주님은 향기 없고 열매 없는 곳에 있는 신부의 소명을 보도록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가’를 보기보다 ‘생명 없는 곳에 보냄 받은, 주님 안에서의 나’를 확인하게 하십니다.

기도 : 사랑하는 주님, 때로 넓은 세상에서 나의 작고 연약함으로 흔들릴 때, 나를 바라보는 대신 주님이 이곳으로 보내신 소명을 붙잡고 힘 있게 살아가게 하소서. 향기 없고 열매 없는 곳으로 나를 부르셨으니 열매 맺고 향기 내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철웅 목사(알타이선교회 순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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