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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21> 미국에 밀고한 간첩으로 몰려 中情 끌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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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 교단의 40대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 기업인 등과 함께 ‘민족해방 기도운동’을 펼쳤다. 정부에서는 민족해방이란 용어를 싫어했다. 우리는 ‘북한 해방’이라고 바꿨다. 나는 이 운동의 대북활동 위원장을 맡고 제2세계(공산권) 연구소 소장을 겸직했다. 당시 통일원 원장이었던 이용희 박사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신변을 걱정했다.

“통일원조차 북한 문헌과 정보에 깊이 관여를 못하는데 중앙정보부(중정)가 가만히 있을까.”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희망하면서 미·남·북 3자회담을 제의하고 나서자 박정희정권은 극도로 긴장했다. 나는 국회 평화통일위원회와 관련된 사람들과 접촉하고 기독교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 ‘민족통일을 위한 기독교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런 활동이 정권의 비위를 건드린 것 같았다. 한번은 국제 통신 관계를 담당하는 정부 고위 관리가 전화했다. “목사님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국제우편과 국제전화를 가장 많이 하는 열 분 중 한 명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이 얘기가 정보 당국의 최우선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고지하는 의미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나는 75년 아세아선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피선된 이후 많은 국제관계 문헌, 특히 외교문서와 국가수반들의 강연, 브리핑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매주 발행되는 백악관 보고서와 국무부 보고서도 꼬박꼬박 챙겼다. 이러한 자료들은 기독교 민족통일 운동의 기초를 다지게 했다.

그러던 78년 5월, 서울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아세아방송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김형근 회장을 만나 입수한 미국 기독교 상·하원 의원, 백악관 비서진, 보좌관 명단을 적은 종이를 건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검은 점퍼 차림의 남자들이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당신들 수색영장 있소.” “잔말 말아.”

그들은 남산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끌고 갔다. 중정 지하 취조실이었다. 내 혐의는 미국 정보조직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혈압 검사를 네 번이나 받으면서 철야조사를 받았다. 당시 미국 윌리엄캐리대 총장 랄프 윈터 박사가 나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허탕을 쳤다. 정보부원들은 그에게도 따라붙었다. 훗날 윈터 박사는 이 일이 동기가 돼 나의 대북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조사는 일주일간 이어졌고 나를 한국의 중정 구조와 동태를 미국에 밀고하는 간첩으로 몰았다.

나는 그제야 김형근 회장을 만나 전해준 종이쪽지가 문제 됐다는 것을 알았다. 쪽지는 국회의원에게 전달됐고 몇몇 의원도 중정에 불려왔다. 나는 사흘이나 더 심한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에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11일 만에 풀려났다.

나는 이 일로 18년간 섬겨오던 후암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교회 밖 사역을 위한 성령의 강권하심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후암교회에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유신정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평화선교운동을 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79년 8월 27일, 경기도 화성 팔탄면 월문리의 거친 산등성이에 ‘바울의 집’을 세우기로 하고 그 첫 삽을 떴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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