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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23> 北 초청장 보내와 방북, 봉수교회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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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북녘 학자와의 만남은 나의 민족화해와 평화선교 운동을 남과 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됐다. 헬싱키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곧 서울로 가 당시 향린교회 담임을 맡고 있던 홍근수 목사와 새문안교회 부목사였던 홍성현 목사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나의 민족교회 형성을 위한 신학적 이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의 신학 정립을 위한 학술회의’를 갖기로 뜻을 모았다.

보수 진영에 속했던 내가 진보적 정치신학을 지향하는 인물들과 손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진보 진영의 오해와 불신이 있었다. 보수 쪽에서는 나를 친북세력으로 전향한 배신자로 매도했다. 두 장벽 사이에 낀 나는 양측 모두에게서 경계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민족 통일에 대한 나의 이론의 틀은 진보와 보수 양 세력이 손을 잡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확신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제3세계 선교단체협의회 의장 자격으로 ‘통일신학동지회’ ‘제3세계신학연구소’와 손잡고 학술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윌리엄캐리대 북한연구실장 홍동근 목사를 비롯해 해외에서 활약 중인 한인 목사를 참가시켰다. 이 모임에 국내 보수 진영 학자로 정성구 당시 총신대 학장, 한명수 기독신문 주필, 이만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을 참석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모임은 분단 44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외 진보 보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자리를 함께한 일대 거사였다.

한편 헬싱키에서 만났던 전금철 안병수 등 북한 대표는 나에게 약속한 대로 평양 초청장을 보내왔다. 88년 8월 5일부로 찍힌 초청장은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명의로 돼 있었다. 방문할 수 있는 날 중에 가장 이른 시일에 방북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1989년 1월 20일 나는 마침내 베이징에서 중국 민항 903편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압록강 상공을 지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공에 들어섰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당시 홍근수 목사도 동행했는데 그 역시 나와 동향(同鄕)이었다. 홍 목사는 고향 산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강토는 모두 잿빛과 흙빛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우리를 맞아준 사람은 헬싱키에서 만났던 노철수 참사관 등이었다. 우리는 입국심사대를 거치지 않고 귀빈실로 안내됐다.

평양 일정은 두 번에 걸친 주일 봉수교회 예배가 하이라이트였다. 봉수교회는 해외 기독교인들과 통일신학동지회가 여러 해 동안 간청하던 교회 설립 요청을 조선노동당이 공식으로 수락해 이루어진 역사적 교회였다. 조선노동당은 80년대 들어서면서 종교활동의 부분적 개방정책을 논의해온 것으로 보인다. 83년부터는 성경과 찬송을 출판했고 89년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설치했다.

1월 22일 주일 아침예배는 10시 시작됐다. 성가대원은 중년여성들뿐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부인은 목사의 딸이라고 들었는데 계속 키를 헛 누를 만큼 서툰 것으로 보아 음악 전공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한 해 후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됐는데, 그때 피아노를 치던 여신도는 나의 친척 문중의 몇 안 되는 목사의 딸로 이름은 조인옥이었다. 당시 봉수교회 집사들은 대부분 남한과 해외에 있는 목회자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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