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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땅과 씨

  •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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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5강) 좋은 땅과 씨
2012.11.11 13:09 


<본문>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설교>

  같은 비유 다른 해석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초점을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자라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는 것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신자는 나쁜 땅이 되지 말고 좋은 땅이 되어서 말씀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백배의 결실을 하여야 한다’는 종교적 교훈으로 결론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문은 마 13장이나 막 4장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비유와 동일한 해석을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에 주지해야 합니다.


내용이 같다고 해서 해석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얘기를 한다고 해도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까지 같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와 누가가 동일하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에 해석의 방향 또한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율법적 실천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유대인들은 신앙의 주권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열심과 실천으로 믿음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여겼기에 열매도 구원도 자신들에게 달린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면서 구원은 인간의 열심과 실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하는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역시 인간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의 씨를 뿌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결실되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마태복음과는 달리 이방인인 데오빌로에게 쓴 서신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신앙을 율법적 실천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유대교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러한 이방인을 향해서 누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복음과 사람


먼저 1-3절을 보면 땅과 씨의 비유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 즉 제자들을 섬기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인 제자들을 섬겼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사람을 가만히 있게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누가는 복음이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말함으로써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증거물로 존재함을 말하고자 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과 죄지은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죄가 사하여진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함으로써 죄 사함 받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단순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세대의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은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는 말씀으로 맺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지혜의 옳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기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세대의 사람들 속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을 만들어 가실 것이고 그들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옳다 함이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사람에게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람에게 중점을 둔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는가를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땅과 씨에 대한 비유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과 인내


15절을 보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 13:23절을 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비유의 결론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있고,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인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본문의 비유는 씨, 즉 천국 복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며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에 천국 복음이 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떨어져 있는 천국 복음이 나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고 어떤 사람으로 살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받았다면 신자는 그 말씀을 붙들고 지키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복된 말씀의 귀함을 안다면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말씀이 주어졌다고 한들 말씀의 귀함을 모른 채 복음의 말씀을 붙들지도 않고 지키는 자로 살지도 않는다면 그 삶은 말씀이 없는 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인해 결실되는 없게 됩니다.

 
말씀으로 인해 결실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본문은 인내라고 말합니다. 즉 신자의 마음에 말씀이 떨어져 있다면 말씀은 신자로 하여금 인내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말씀으로 인한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도 말씀으로 인해서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인내가 요구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인내가 없이는 말씀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에게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세상을 장악하며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리의 유혹과 염려가 끊이지 않게 하는 곳 또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이길 힘이 신자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신자로 하여금 흔들림이 없이 천국을 향한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자의 형편이기 때문에 인내가 요구되는 것이고, 인내하게 하는 것 또한 하늘의 복된 말씀인 것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인내함으로써 지혜, 즉 천국의 복음이 옳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참고 견디는 의미의 인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 소유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세상에서 신자는 자기 소유로 섬기는 길을 갑니다. 소유가 힘이 되고 소유가 있어야 자신을 지키며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자기 소유로 섬기는 길을 가는 것이야 말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신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씀이 신자를 이끌어 가는 길입니다. 말씀이 신자를 어떤 길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까? 소유의 확장입니까? 아니면 자기 욕망의 성취입니까? 아닙니다. 말씀은 신자를 섬김의 길로 가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이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우리를 어떤 삶의 길로 이끌어 가는지를 생각한다면 말씀을 붙들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며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해야 합니다. 이러한 한탄이 있다는 것이 곧 좋은 땅에 말씀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신으로 인해 한탄하게 되는 것 또한 스스로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말씀을 지키며 말씀이 인도하는 길로 가지 못하는 것으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인해 한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섬김이 없음으로 말씀의 증거자로 살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한탄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말씀이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말씀 스스로 말씀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이 같은 말씀의 세계는 오로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신자들만이 보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다면


10절에서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즉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누군가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각 동네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한 사람들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까요? 자기 본성에 이끌려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성에 이끌려 살기 때문에 말씀을 빼앗깁니다. 오로지 자기의 일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있다가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다시 자신의 문제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로 인한 끊임없는 염려, 걱정과 유혹 때문에 말씀을 듣고 지키는 문제를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길가와 바위 위와 가시떨기 땅의 형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씀이 떨어진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저기서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 좋은 땅이 있고 예수님은 그 땅에 씨를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씨가 뿌려지고 결실하는 좋은 땅이라는 것을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결실을 통해서 나타내게 됩니다. 이것이 그 마음에 말씀이 있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신자라면 자기 소유로 섬기는 길로 가게 됩니다. 단지 자기 소유를 가지고 타인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자기의 길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분명히 압니다. 물론 사탄이 장악한 세상에서 길가나 바위 가시떨기와 같은 땅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이 같은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탄하고 회개하며 늘 주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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