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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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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이사야 63장 1-6절)


< 부족함을 인지하는 능력 >

 사람들은 “누가 높은가?”에 관심이 많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 중 누가 더 높으실까?”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정작 예수님에게는 그런 관심이 없으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로마의 압제에서 암울하게 살던 백성들에게 구원과 진리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에 있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죄를 강물에 흘려보내 백성들의 마음의 샘을 맑게 했던 세례 요한에게도 그런 관심은 없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능력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능력을 자랑한다.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최고 능력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는 능력이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칭송했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위대함은 담대하게 회개를 외쳤다는 사실보다 자기 한계를 알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등잔불을 끄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선포했다. “저는 능력이 많으신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극도로 낮춘 이유는 자기의 한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는 능력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빚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그것이 예수님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지만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한 몸이 되는 능력은 없었다.

 예수님도 공생애 직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셨고 가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지만 예수님의 자리는 대개 어두운 세상 한 복판이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름다운 삶을 통해 영혼을 하늘 길로 인도하셨다. 왜 예수님은 죄의 홍수로 흙탕물이 된 세상에 뛰어드셨는가? 하류로 인생들과 함께 흘러내리시면서 세상을 맑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광야의 수도자도 위대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현실화시키는 사람은 더욱 위대하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키를 들고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실 것이다. 그때 쭉정이 인생이 되지 않도록 늘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라.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영혼의 심지에 거룩한 불꽃을 새롭게 점화시키라.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고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라.

<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

 본문에는 능력으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시작도 주관하지만 끝도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삶도 고안하고 허락하셨지만 죽음도 고안하고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끝내시고자 작정하시면 무섭게 끝내신다. 하나님을 결코 우습게 여기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라. 타락이란 삶의 목표가 일그러지는 것이다. 교회와 교인의 타락은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을 부른다.

 1950년 4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장소에 4일간의 싸움 때문에 경찰이 투입되었다. 그래도 교회 리더들이 서로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거룩한 성전에서 멱살을 잡고 피 흘릴 정도로 싸웠다, 5일째 되던 날 그들은 한 가지만 결의하고 해산했다. 1950년 가을에 다시 총회를 연다는 결정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하나님의 심판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교회 권사의 아들이었다. 당시 남한 대통령인 이승만은 장로였다. 6.25는 잘못된 교회와 교인이 대한 일종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정죄의 심판은 없어도 심은 대로 거두는 공의의 심판은 있다. 그러므로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라. 사람의 판단은 부정확하고 잘못될 수 있다. 남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잘못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남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 스스로 판단해 가라지를 뽑겠다고 열을 올리지 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다.

 세상만사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쉽게 재단되지 않는다. 사람의 삶과 성품도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세상도 단순하지 않고 상황도 단순하지 않고 사람도 단순하지 않다. 악인이 형통을 노래하고 선인이 고통에 신음할 때도 많다. 그것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가라지라고 해서 함부로 뽑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가라지로 판단해서 뽑는 책임을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 사랑은 돌다리도 두드리는 조심스러움에 깃들 때가 많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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