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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과 성령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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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과 성령

요 3:1-13,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2018년 5월27일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 이야기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산헤드린 의원이고, 예수님께 상당한 호기심을 보인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합니다. 요 3장과 7장과 19장입니다. 7장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문책하기 위해서 체포해오라고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이 일행을 가리켜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순간 니고데모가 나서서 ‘직접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행위를 확실하게 알아보기 전에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요 7:51)고 하면서 예수와 그 일행을 두둔합니다. 19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 매장되는 장면입니다. 39절은 이렇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여기서 언급된 ‘밤’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요 3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니고데모의 나이는 그의 직책으로 놓고 볼 때 예수보다 어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니고데모가 던진 첫 마디를 실제 상황에 맞도록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우리 산헤드린 의원들은 당신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표적들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니고데모는 선의로 예수님을 찾아온 게 분명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높게 평가한 근거는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표적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라든지,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린 것, 엘리야의 여러 가지 기적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입니다. 예수님도 환자나 장애인을 고치고, 군중들의 마음을 치유하셨으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본 것은 당연합니다.


니고데모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덕담 차원에서라도 당연히 이렇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니고데모 선생, 부족한 저를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소이다. 우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는 일에 기회가 닿는 대로 협조합시다.’ 그런데 예상 외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민망해 할 수도 있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것도 제가 풀어서 읽겠습니다. ‘당신이 속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강력한 표적과 기적을 통해서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한다는 것이겠지요. 그게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본문인 요 3장의 주제는 보통 니고데모의 ‘거듭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적인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강조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강조되었습니다. 거듭남도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3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5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입장에 따라서 신앙의 성격이 달라지고 삶도 달라집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에서 대충 살고 죽음 이후만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입장이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로 표현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를 대표하고, 예수님은 아직 유대교와의 관계설정이 끝나지 않는 기독교를 대표합니다.

 

표적 신앙


유대교는 표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바울도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표적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에 바탕을 둡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섭리하시며 결정적인 순간에 완성하실 터이니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당연히 붙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표적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믿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하나가 묵시사상으로 결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현재의 세상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실 때 인자를 세상에 보내서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을 근거로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인자를 보내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유대인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이루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이런 생각이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절실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로마제국이라는 악한 정치와 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살기 좋은 세상이 가능합니다. 살기 좋은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표적이라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표적 신앙은 21세기 현대인들의 삶도 지배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노골적으로 찾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멋진 세상을 기대하는 거는 맞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모든 나라는 부자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병도 없고, 돈벌이도 좋고,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인생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간혹 목사들도 간증이라는 방식으로 교인 자랑과 자식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인생이 잘 풀린 것이 바로 믿음 생활을 잘하는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런 게 인지상정이기는 합니다.

 

거듭남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표적 신앙에 머물지 않고 더 근본적인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종교적인 메타포입니다. 이걸 니고데모처럼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머니 자궁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거듭난다.’는 단어에 달린 각주는 ‘위에서’입니다. 위로부터와 새롭게라는 뜻이 거듭난다는 단어에 들어있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인격의 총체적 변화를 가리킵니다. 이런 변화가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표적을 찾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거듭나는 삶의 태도가, 즉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삶의 태도가 왜 옳은지를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이건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리 큰 표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 풍요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여겼지만 가나안에서의 삶도 역시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던 때와 다를 게 별로 없었습니다. 여전히 가나안 부족들과 싸워야했고, 바알숭배의 유혹을 받아야만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봤어도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와 직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 살면서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보다 훨씬 더 깊은 신앙을 경험했을 겁니다. 스웨덴이나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는 복지 문제에서 세계 모든 나라의 모델입니다. 21세기의 복지는 바로 성경이 말하는 표적입니다. 복지가 잘 된 북유럽 국가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네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종종 교회 문제를 거론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가장 실질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5년 뒤에 우리교회가 입지가 좋은 곳에 단독 건물로 교회당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하기 좋은 말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의 교회당을 소유했다고 해서 신자들이 행복한 게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진다는 게, 즉 거듭난다는 게 실제로 무엇일까요? 니고데모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 전문가로서 하나님 나라와 인자와 심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단지 정보로만 알고 있어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종교 전문가들의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목사들도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세계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에 잘 나온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손으로 잡아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미심쩍어하고, 그래서 다시 눈에 보이는 율법적인 신앙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7,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표현에서 바람은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이 문장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우리말 그대로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영이 임의로 분다.’는 문장입니다. 헬라어 프뉴마는 바람이라는 뜻과 영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영의 현상과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던 것처럼 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우리가 계산해서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영이 우리에게 왔을 때만 가능한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종종 했을 겁니다. 영혼의 자유와 평화가 충만해지는 경험 말입니다. 길을 걷다가, 또는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다가, 책을 읽거나 직장에서 업무를 보다가, 혹은 조용히 묵상하거나 성경을 읽다가 무한한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평화와 기쁨이 충만해지는 게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되는지를 인공지능으로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하긴 합니다. 가장 흔하게는 술을 마시는 겁니다. 그 외에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을 열거해보십시오. 여행도 가능하고, 각종 취미생활도 도움을 줄 겁니다. 음악에 심취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때 기분이 좋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압니다. 일상생활에 지쳤다가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게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건 아닙니다. 더구나 현실도피의 방식으로 그런 일에 빠져들면 삶이 더 파괴됩니다. 집밖에 나가서 실컷 즐기다가 집에 들어오면서 더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압박감과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집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을 불편해합니다.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런 즐거운 경험은 일시적입니다. 바람처럼 잠시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니고데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령으로 새로워질 수 있느냐고 물은 겁니다. 이 질문은 유대교 산헤드린과 회당 공동체가 신흥종교인 기독교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우리도 얻고 싶은데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기독교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의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13절은 이렇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런 대답은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니고데모도 속 시원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자라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 자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에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성육신, 마지막 심판, 부활과 승천 등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 문장을 하나로 정리한다면 예수만이 생명의 비밀을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도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리겠지요. 예수만이 하나님 나라와 실제로 일치된 자라고 하면 어느 정도 가깝게 들릴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한 자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의 이런 영적인 상태를 가리켜서 그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울은 고후 4:6절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님이 생명 구원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역시 그런 신앙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굳이 하나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서편제 같은 전통 소리를 배워본 분이 있습니까? 득음의 세계에 들어간 소리의 고수를 찾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고수를 통해서 소리의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는 게 소리 공부입니다. 득음을 하나님 나라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이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도 말하고, 거기에 들어간다고도 말하는 걸 보면 하나님 나라가 소리의 절정인 득음의 세계와 비슷합니다. 하늘에서 온 자이며 하늘로 올라간 자인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려는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여러분을 공연히 귀찮게 하는 잔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눈을 뜨라는 경고이며 거룩한 가르침입니다. 그 예수님에게 실제로 더 가까이 가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거듭난다는 것이, 즉 성령으로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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