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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기도

  • 양주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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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기도 (요한계시록 8:1-5/ 6월12일)
2016-06-17    

 
서론
 
오늘 본문은 일곱인 재앙 중 마지막 일곱번째 인에 대한 묵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인 재앙은 그 자체적으로는 재앙을 내포하지 않고 계속되는 일곱 나팔 재앙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일곱째 인 곧 일곱 나팔 재앙을 위한 일곱째 인을 뗀 후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되기 직전의 일종의 서막인 것입니다.
 

본론
 

1절은 일곱째 인을 떼자 하늘이 반시간 동안 고요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여기서 ‘반 시간 동안’이란 문자 그대로 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짧은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고요’란 장차 있을 심판을 앞두고 천지 만물이 숨죽이는 것을 묘사합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라면 일곱 인을 떼실 때 천지가 고요해졌다는 말씀 앞에서 잠시 후에 있을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하나님이 안 보시거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기를 치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죽어봐야 알지 하며 더 방자하고 교만해짐으로써 더 큰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잠시 하나님께서 침묵 하실 때 그것은 더 큰 심판의 징조임을 알고 그럴수록 더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하며 근신해야 겠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21장34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2절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일곱인은 예수님께서 떼시고, 일곱 나팔은 천사가 부는 것입니다.
 

3-5절에서 한 천사가 향연과 합해진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보좌 앞에 봉헌하고 단 위의 불을 땅에 쏟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계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여기서 금 향로(a golden censer)는 금으로 된 향을 피우는 자그마한 화로를 말합니다. 우리는3절 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알수 있습니다. 천사의 나팔과 함께 시작된 재앙이 향연과 함께 올라간 성도들의 기도 응답의 결과인 것입니다. 일곱인 재앙이 계시록5장9-11절의 순교자들의 탄원 기도에 의한 응답인 것처럼 , 오늘부터 살펴보는 일곱 나팔 재앙은 성도의 기도 응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인류 역사의 운명을 판가름할 결정적인 사건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도를 장난하듯이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실까? 들으실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기도하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기도합니다. 또 식당에서 기도할때 좌우에 누가 있나 살피고 잠깐 눈만 감았다 뜨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예배 나와서 계속 기도하는데 내용은 없고 ‘주시옵소서’라는 말만 30분 동안 계속하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협박하는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한풀이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는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4절을 보면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여기서 향연(The smoke of the incense)은 향이타는 연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열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결코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간절히 소망하는게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구하세요. 마태복음 7장7-11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입을 벌리고 “아빠 꿀떡주세요” 하는데 거기에 돌을 넣어 주고, 또 아들이 “아빠 생선 주세요.” 하는데 거기에 뱀을 넣어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5절을 보면 천사가 제단 위의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을 때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여기서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동시에 천지를 울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향로의 불을 땅에 쏟을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 응답이 이러한 형태로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앞서 향연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 성도들의 기도는 이후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다시 땅으로 내려와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와 맞물려 완성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경험 철학의 시조이자 근대 과학의 길을 열었던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곧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그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힘과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거와 비교해 보면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20년전만 해도 상상못하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전화통화는 물론 대부분의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인공지능 로봇이 만들어져 이제는 많은 일들을 사람대신 로봇이 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 항공우주 과학도 엄청나게 발전하여 우리가 사는 지구를 벗어나 화성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과학이 발달한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호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과학지식이 아무리 발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운행하심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할지라도 컴퓨터보다 훨씬 정교한 사람을 창조하고 주관하는게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우주에 비하면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티끌만도 못하는데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주끝까지 가보는 것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또 컴퓨터보다 정확하게 우주와 지구와 모든 피조물들을 운행하는게 가능할까요? 만약 사람이 과학기술을 이용해 이것을 운행한다고 해도 지구 공전과 자전축 그리고 운행속도가 조금만 틀려져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너무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져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창조과학회 과학자들도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절대자가 없이는 이 세상의 창조와 운행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또 아무리 정교한 과학지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천지를 진동시킴으로써 사단까지 두려워 떨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는 기도야말로 그 어떤 과학 지식보다 앞서는 최상의 힘과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는 것이 힘이라면 기도는 이보다 훨씬 뛰어나 가장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 존 낙스와 싸우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나는 백만 대군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훨씬 더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며 세상과 싸우고 사단과 대적할 때에 우리의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는 기도의 능력으로 모든 사단의 세력을 제압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만천하에 증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되 반드시 때를 따라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4장16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저는 우리나라가 1945년에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처럼 지독하고 어떤 강압에도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일본이었는데, 왜 하필 그때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거기에 투하되고 일본이 두손두발 다 들고 무조건 항복을 했을가? 저는 이것이 지하감옥에서 끝없이 나라를 위해 기도한 순교자들의 기도응답이라고 믿습니다.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이 화해하고 정치적으로 통일전략을 짜고 다 좋지만 근본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천지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 향기가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완변한 타이밍에 응답하실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북한 지하교회에서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성도들, 남한에서, 또 해외에서 밤낮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면 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질줄로 믿습니다.
 

결론
 

저는 우리 탈라하시 장로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도 금년표어가 “여호와를 찾으라” 입니다. 그리고 실천사항으로 첫째 말씀을 따라 사는 교회, 둘째 기도하는 교회 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나와 예배드리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마귀의 공격이 있습니까? 또 우리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마귀가 얼마나 많이 공격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교회 성도수가 많은 교회가 꼭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만 많아서 막 왔다갔다 하는 것은 거품입니다. 물론 저희 교회가 성도수도 좀 늘어야 되겠지만 우선순위가 있는 겁니다. 몇 명이 모일지라도 정말로 기도하는 성도, 매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 치는 성도들의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탈라하시 장로교회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의 향기를 올려드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잠시 하늘이 고요해졌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또한 6절에서 일곱 천사들이 나팔 불기를 예비하고 있었다고 함으로써 이후에 있을 나팔 재앙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나팔 재앙이 있기 전에 성도들의 기도가 향연과 함께 올라가고 다시 그 향로의 불을 땅에 쏟는 일이 선행되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얼마나 귀히 보시며 응답해 주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며 동시에 이 땅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들임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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