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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위를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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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위를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

요14:7-14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을 복음서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의 이야기를 씁니다.

 

마가복음--세례요한이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인용하여 예언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아가 예수라고 씁니다.

마태복음--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예수라고 씁니다.

누가복음--예수가 구약의 성취로서 세계사에 우뚝 솟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이라고 씁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인사치레 같은 이해를 걷어치우고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예수라고 쓰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땅으로 내려 오셔서 인간처럼 걸어 다니는 분이 바로 예수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분은 빛 중의 빛이며,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시는 분이시며, 목마름이 없는 살아있는 물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선한 목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온갖 수사와 호칭으로 예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요 10:30, 17:11, 21).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전도서 5장 1절)는 말씀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천지보다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자렛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문”을 그들의 기도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항이 심한데 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의 사유와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요?

 

오늘 제가 나누려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왜 요한복음서는 육체적인 혈통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사렛 촌 동네의 한 목수의 아들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왜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곧 말씀이 살코기(肉)가 되었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통해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늘로 수십 번 찔러도 아프다는 소리하나 하지 않는 바위와 달리, 한곳에 머물러 한 평생을 사는 식물과 달리, 땅만 쳐다보고 기어가는 네발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늘을 향해 사유하는 머리로, 두 발로 움직이는 행동으로, 민감한 감수성으로 지구상에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이 문명사회에서 제 스스로 서려면 보통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서른이 되어서야 섰다(三十而立)라고 말했지요. 현대사회에서도 부모 곁을 떠나 자립하여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면 서른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받고(유아기 0-5세), 학교에 들어가고(유년기 6-12세), 사춘기(13-19)를 지나 청년이 되고 곧 사회에 적응하는 성인이 되는데 30년이나 걸리는 거지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충분한 영양이나 정서적 돌봄, 지적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넘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 삶을 살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에 노출되고 자기 파괴적 삶을 살게 됩니다. 성인기를 지나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죽음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두, 세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살고 그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 삶의 여정에서 신앙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또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제가 만난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자신들 내부에 가득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거나, 삶의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크고 안락한 침대역할을 하는 이였습니다. 프로이트가 비판한 대로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한 때 자신이 사랑하고 무서워하던 유아기 때의 육신의 아버지를 이상화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이 안 되서 행복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신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하는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종교인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망, 여러분의 욕구, 여러분의 자기보존 본능을 충족시키고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상처가 회복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잘못된 이기적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추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십억의 돈방석에 앉기 위해 바로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도시재개발업자들의 욕망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로서의 종교는 역사 속에서 제도와 의식, 율법 등을 만들어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그 종교 때문에 피폐한 삶을 사는지 보아서 알 것입니다. 그래서 제 후배 중 한명은 제게 교회보다 술집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반면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 비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참 사람은 괜찮아. 기독교인인데도 괜찮은 사람이라 말이지. 허 참.”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이제 인간다운 인간, 새 인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면 어차피 인간이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하는 모든 말 곧 신학이라든지, 신앙고백적 언어는 사실 모두 인간의 말일 뿐이라는 것을 요한은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은 새로운 창조이야기인 요한복음서를 쓰면서 거꾸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해 냅니다. 요한복음서 10장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10:35).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욕망 덩어리일 뿐인가? 요한은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해 먹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종과 여인과 제자에게 군림하며 부려먹는 주인과 남자와 선생이 있는 반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는 친구도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13장).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그런 사랑도 있음을 말합니다(15:13).

 

요한공동체는 신앙의 성숙을 위해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나 메시아로만 인식했던 초기의 제자들에 비해 참된 삶, 영생이 무엇인가를 물었던 니고데모처럼 정치사회적 안정만을 통한 행복추구보다 더 고차원적 삶, 위로부터 거듭나는 얼로 가득하게 솟아나는 삶을 고민합니다. 물로 씻어내는 정화의식을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죄의 순환을 끊고 사랑과 기쁨 가득한 혼인잔치처럼 축제를 통해 적극적인 선을 이루려고 합니다. 가나의 포도주 기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상징하는 성만찬 의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며 진정한 참된 하늘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예언자와 구원자로 부르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썩어 부패한 죽음의 동굴에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말합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계 공동체들이 중시했던 조직과 규칙, 제도와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평화와 화해와 유연성을 주는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솔솔솔 예기치 못하게 불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전에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야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 판에 직접 하나님께서 새겨놓은 그 음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예레미야 31:34). 이것이 새로운 약속이고 우리가 제2성서를 신약(新約)이라고 부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성전 건물을 때려 부숴도 참 성전인 양심은 사흘 만에 살아납니다.

 

루터의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이죠. 저는 인간이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 자유를 가지고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공동체 내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적통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여전히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았던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자본으로 덧칠한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었고, 시시 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공동체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다운 인간의 새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칫하면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서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 그리고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곳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기도하신대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요한공동체도 하나님과 예수 안에 있어 서로 완전히 하나 되는 길이라 믿었던 것입니다(17:20-26).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일을 요한공동체는 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땅 위를 걸으시는 하나님” 즉 예수를 통해 인간들에게 “참된 삶”과 ‘새로운 인간’은 무엇이며,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이 가능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복음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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