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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영호 <1> 일제강점기에도 예배드린 믿음의 가정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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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가 국민일보에 소개된다니 영 어색하다. 숱한 가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내게 과연 내세울 만한 열매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격동의 시기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 중의 하나였노라 인정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나는 1938년 5월 15일 강원도 삼척 정라진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항구에서 어업중개소 일을 하셨다. 난 어려서부터 결점이 많았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때까지 앞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섯 살 때 결핵성 관절염을 앓은 뒤 왼쪽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장애를 얻었다. 한의사가 고쳐 보려고 온몸에 침을 놓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동침(銅鍼·구리로 된 굵은 침)이 튕겨질 때마다 아파 진저리를 쳤다.

부모님은 삼척읍으로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와 형은 날 번갈아 업어가며 교회로 데려갔다. 밤이 되면 종종 우리 집에서 교회 모임이 열렸다. 어머니는 교회 분들이 오면 빨강과 검정색 겹으로 된 두꺼운 천으로 창문을 가렸다. 일본 순사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랬다고 한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극렬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정라항에 잠수함이 들어올 수 있게 바다 바닥을 파는 작업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첩첩산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우리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줌치리라는 곳까지 들어갔다. 어릴 땐 기와집에 사람이 살고 초가집에 돼지가 산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이 바로 돼지가 사는 곳이었다. 이사 온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난 9살이 돼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한글과 구구단을 아버지에게 배웠다. 아버지는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의 가사를 써 놓으시고 “이것이 ‘예’자 이것이 ‘수’자니라”고 하셨다. 구구단은 한문으로 “사사(四四) 십육(十六)이니라”고 쓰며 알려주셨다. 친척 누나가 인근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셨는데 한낮 집 주변을 쏘다니는 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입학시켜 줬다. 담임선생님은 책을 읽고 구구단을 안다며 날 2학년 반으로 넣어주었다.

3학년 때 축구시합이 열렸다. 난 지게 작대기를 짚고 선수로 뛰었다. 우리 반이 옆 반을 이겼다. 옆 반 선생님은 “야 이놈들아, 병신이 들어가서 뛰는 반에도 지느냐”면서 단체 기합을 줬다. 이 말은 내 마음속에 큰 상처가 됐다. 이후로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누군가와 싸움을 하게 되면 죽기를 각오하고 덤볐다. 어차피 ‘너나 나나 둘 다 죽는데 나는 병신으로 죽고 너는 성한 놈으로 죽으니 네가 더 손해’라는 생각을 했다.

6·25전쟁이 나기 한 해 전에 아버지는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상군두리의 조그만 기도처로 전도사 파송을 받았다. 홍천읍 교회 장로였던 아버지가 교역자가 된 것이다. 형과 나는 홍천읍에 남아 공부했는데 전쟁이 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초등학교 공부는 거기까지였다.

약력=△1938년 강원도 삼척 출생 △58년 홍천농업고등학교 졸업 △62년 감리교 신학대학교 졸업 △74년 선교대학원 졸업 △62년 4월 서석교회 담임 △65년 외산포교회 개척 △66년 동홍천교회 담임 △67년 2월 홍천감리교회 담임 △73년 2월 춘천서부감리교회 담임 △80년 2월 남춘천 감리교회 담임 △89년 5월 한길교회 담임

정리=김상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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