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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15> “장군께서 허락”… 평양과기대 부지로 군부대 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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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5월 북한 교육성과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사장 곽선희)은 평양과기대 설립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6월에는 우리 통일부에서도 사업 승인과 사업자 승인이 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진경 총장을 평양에 초청한 지 4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양측이 계약한 ‘평양과기대 기본계약서’에 따르면 북한 교육성에서는 땅을 제공하고 남측은 학교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설비와 교직원 구성 등을 맡기로 했다. 특히 인사권과 운영권, 대학 건설을 위한 계약도 재단과 설립총장에게 위임했다.

대학 운영은 개교일로부터 50년간 남북이 공동으로 하되 합의에 따라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규모는 부지 100만㎡(33만평)에 건평은 8만9000㎡(2만7000평)이며 박사원(대학원)과 학부를 두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학교 부지를 정하기 위해 여름에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이 마련해준 학교 부지는 평양 북쪽 농경지였다. 국제적인 대학을 세우기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건설위원장이던 내가 악역을 맡았다. “학교 부지로 이런 데를 주려고 하십니까.”

고속도로 옆, 그리고 산중턱이나 언덕 위 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두 조건을 충족할 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북한 교육성에서는 고등교육국장이 실무자로 나섰다. “가 봐야 소용없어요. 거기는 군부대입니다.”

대동강을 건너 개성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5∼6분 정도 달려가니 통일헌장탑을 지나 원산으로 가는 인터체인지가 있는 언덕 부근에 군부대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일단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다. “부대에 들어가 봅시다. 장군님이 초청했는데 왜 안 되겠소.”

군부대에 페치카도 보이고 곡사포도 보였다. 우리로 치면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부대 같은 부대였다. “여기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평양과기대를 세웁시다.”

나는 큰소리쳤지만 속으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틀 뒤 고등교육국장이 호텔로 찾아왔다. “축하합네다. 장군님께서 허락하셨수다.”

군부대가 평양과기대 부지로 정해지다니, 우리는 믿기지 않았다. 1년여의 설계 끝에 건설 업체가 정해진 뒤 현장작업반이 장비를 끌고 언덕을 올라갔다가 평평한 지역에서 오래된 집터를 발견했다고 연락이 왔다. 수소문해 보니 “일제 강점기 때 교회가 있었다”고 했다.

고증에 들어갔다. 영국 웨일스에 유학 가서 로버트 토머스(1840∼1866) 선교사를 전공한 고무송 목사와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이를 맡았다. 상하이 파송 선교사 토머스가 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수심이 얕은 양각도란 섬에서 모래톱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조선 군사들은 한밤중에 제너럴셔먼호에 불붙인 짚단을 던져 불태웠고 토머스 선교사와 선원들은 끌려나와 목이 잘리고 말았다. 이때 배에서 성경책을 주워 읽은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평양과기대 위치에서 보면 5∼6㎞ 떨어진 대동강에 쑥도와 양각도 중간 사이로 고속도로 교량이 보인다. 선원들은 이곳을 지나다 참변을 당했고 토머스 선교사의 시신은 쑥도에 묻혔다. 고증 결과 일제 강점기 평양 기독교인들이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교회를 쑥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평양과기대 일로 인해 토머스 선교사의 옛 자취가 드러났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 평양과기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예표라고 나는 믿는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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