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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아들 디모데 (행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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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1차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일행이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1차 때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다녔습니다마는 2차 때에는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따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루스드라와 더베에 이르는데 시간적으로 계산해보면 5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니까 1차 전도여행 때에 이 루스드라 및 근방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핍박을 받고, 또 교회도 세우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사도 바울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때에 바울은 훌륭한 크리스찬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1절)'-여기서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제자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제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복음서에서 제자라고 하면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다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 뜻을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게 배우라'하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의 헬라 원문은 '마데테 아프'입니다. '제자 되다'라는 뜻입니다. '내 제자 되라'--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 예수님의 제자다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제자'라 말씀합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디모데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우선 생각해야 되 것인즉 바울이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에 디모데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5년 전부터 믿는 것 같습니다. 5년 전에 믿기 시작했는데 5년 동안 그 믿음이 더욱 잘 자랐어요. 이제 바울이 와서 보니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지 5년된 사람입니다. 5년 전에 전도했는데 5년 후인 지금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가끔 저는 해외에 나갔다가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해외에서 어떤 분을 만났을 때, 그 분은 제가 잘 못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까? 더구나 저는 원래 사람을 잘 기억 못해요. 사람 이름 기억 못하는 데에는 소질이 뛰어나요. 저분은 나를 보고 반가워서 '아, 목사님'하지만 저는 얼떨떨합니다. 이런 경우 어떤 분은 제게 딱 보여주는 것이 있어요. 바로 제 서명이 있는 성경책입니다. 그분의 결혼을 주례할 때에 사용한 성경책입니다. 저는 으레 성경책에 서명을 해서 신랑 신부에게 주거든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써서 '주례자 곽선희'라고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못알아보고 어리둥절해 있으면 이 성경책을 딱 내놓고는 '목사님이 저희 결혼에 주례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증명서입니다'합니다. 그 성경책을 보면 언젯적 일인지는 모르나 제가 주례한 것만은 분명해야. '그 동안 이 성경책을 보면서 우리 내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습니다.'--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기억력은 맹랑한 대로 반갑기는 정말 반가워요.
일찍이 5년 전에 이곳에 와 전도하고 떠날 때에는 바울에게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어요? 이 사람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해줄 것인지, 앞으로 있을 숱한 핍박을 어떻게 견딜는지--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5년만에 다시 와보니 아주 훌륭한, 더구나 청년인 디모데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인근 일대에서는 지도급에 속하는 교인이 되어 잘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좋아서 그를 지금 자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합니다. 특별히 자기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 뒤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마다 '내 참 믿음의 아들 디모데' '내 아들 디모데'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디모데를 사랑했고, 그만큼 디모데를 믿었습니다. 미상불 디모데라는 사람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디모데'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이 같은 신앙적 이름을 지어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사람이요 어머니는 유대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외조모가 있었다는 것,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디모데의 신병(身柄) 사항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에 보면 그 아버지에 대한 시제(時制)는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그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것 같다고, 적어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을 때에는 디모데의 아버지는 생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을 하게 됩니다. 결국은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사이에서 자라고 오늘의 믿음을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튼 디모데의 어머니는 이방 땅에 살면서 헬라사람과 결혼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려 할 때에 그에게 할례를 베풀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방사람은 할례 받을 필요 없다고 이미 규정되어 있는 터이지만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베풉니다. 유대사람을 상대로 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에 거치는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디모데는 반은 유대인이고 반은 헬라인이거든요. 어정쩡해요. 이방사람으로 대할 수도 없고, 헬라사람으로 대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유대사람들이 불평하는 것을 보고 할례를 주어서 온전한 유대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디모데는 유대사람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3-5절로 보면 바울의 역시 믿음의 아들인 디도에게는 사도 바울이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방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사람으로서 앞으로 이방사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원해서 할례를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 디모데는 절반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베풀어 온전한 유대사람으로 행세하게 하고, 디도는 온전한 헬라사람이므로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본디 종교 문제나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가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마는 습관이나 관례, 그리고 정책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듯 너그럽게 양보를 해서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할례를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다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을 여기서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후계자가 필요했습니다. 전도하면서부터 후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오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디모데는 동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계자입니다. 그냥 따라다니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닙니다. 적어도 바울의 일을 장차 계승해 나갈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동역자가 아니라 계승자가 바울에게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 실라라고 하는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동역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래도 함께 다니는 수행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마가는 젊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젊은 사람 마가를 수행케 한 것은 장차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에서였습니다. 실제로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해서 바울 이후에도 선교 사업을 이어가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마가가 도중하차했을 떼에 몹시도 섭섭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마가를 잃은 자리에 바울은 이제 디모데를 채우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동반자가 아닙니다. 수행원이 아닙니다. 엄연히 후계자입니다. 후계자를 구하는 바울의 마음, 오늘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에 의해서 무너져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고 죽고, 가고 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사업은 무궁토록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대를 이어 계승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후계자며 귀한 일꾼들을 주위에 세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는 일꾼 양성을 잊지 않았어요. 후계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바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그의 선교 사역은 단절 없이 더 크게 더 넓게 확장되어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인 이렇게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었다면 바울의 순교와 함께 그 사역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어느 길로든 통하여 이어지겠지마는 바울의 책임감은 그렇게 투철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후계자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그는 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종말론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느 마을에고 들어갔다 하면 으레 한번씩은 얻어맞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이고 보니 어느 때 어디서 어떻게 죽을는지 모르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아무 때에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업, 바울의 그 귀한 정신은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가르칠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의 일을 실제로 다 보고, 본받는 제자이어야 합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여러 차례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너는 나를 본받아라, 내가 네게 본을 보였다--철저하게 본받는 제자, 자기의 일을 중단 없이 이어갈 제자로서 디모데를 택한 것입니다.
여기 디모데의 성격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디모데의 인간성을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대단히 감상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디모데후서 1장 4절에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감정이 좀 앞서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무릇 지성 주도적인 사람이 있고 의지 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의지 주도적인 사람은 일생에 딱 두 번 운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참 눈물이 많아요. 요새는 그런 분을 보기 어렵지만 전에 보니 강대 위에 나와 기도하는 장로님들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하다가 한참 울고 나서 기도하는 분이 있어요. 아주 감상적이지요.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무슨 일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게 되었는지 자세하지는 않으나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어지간히도 보고 싶어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몹시 보고 싶어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보고 싶어 울 정도로 감상적인 분이었던가봅니다.
또, 디모데전서 4장 12절을 보면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디모데는 아주 심약한 사람이요,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구나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0절에 보면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합니다. 역시 디모데는 좀 약한 사람이었어요. 고린도교회에 가면 디모데가 벌벌 떨 것 같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특별히 그렇게 부탁한 것입니다. 좀 두려움 없이 일하도록 도와주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 한번은 신학대학 졸업반 학생을 불러다가 저녁예배에 설교를 시켜보았더니 설교를 하는데 이쪽만 바라보거나 천장 쪽만 초점 없이 바라보면서 해요. 그래, 왜 그쪽만 바라보고 설교를 했느냐고 뒤에 물어보았더니 '목사님, 이쪽을 보았더니 성가대가 있는데 제가 총각이 아닙니까? 여름이라 많이 벗었는데다 얼굴도 예쁜 여자들이 죽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정신이 얼얼해져요. 그래서 천장만 바라보았지요'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30여 년을 해와서 이제는 '프로'가 되었지만 아닌게아니라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디모데가 낯선 곳 고린도교회에 가면 아무래도 벌벌 떨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디모데가 가거든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유념하라고 고린도교회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디모데는 담대함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누이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 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심약한데다 몸도 약했어요.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보면 그는 늘 소화 불량으로 고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는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라고 바울이 자상하게 건강까지 챙겨주는 것을 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디모데의 신앙은 전승적 신앙입니다.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받은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적 신앙을 먼저 받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 신앙은 예수 믿으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사람으로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있어요. 만일에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 여자하고 결혼을 하면 유대사회에서는 그를 아주 멸시합니다. 타락했다고 칩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가 죽었다고 하면서 장례식까지 치르고 맙니다. 그런데 유대 여자가 이방 남자하고 결혼했을 경우,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문제가 달라져요. 유대 남자가 이방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방사람이지만 이스라엘 여자와 이방 남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태반이 이스라엘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에는 모계(母系)를 따르는 셈입니다. 어머니의 교육이 종교 교육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라는 반증이 됩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아버지는 헬라사람이요 어머니는 유대 사람인데 여기서 태어난 디모데는 유대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철저한 히브리적 신앙의 사람이 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을 만났을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디모데는 본디 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신앙을 따른 이른바 '모태적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이제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이 되는데, 바울의 후계자로 지목될만한 자격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사도 바울이 특별히 지명함으로 후계자가 되는데 궁금한 것은 그 자격입니다. 몇 가지,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납니다. 2절에 보니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합니다. 칭찬 받는다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칭찬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비난받는 사람, 말썽이 있는 사람,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지요. 디모데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순종을 하고, 엄격히 말해서 그 밖의 모든 법에 대해서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그로 해서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됩니다. 뜻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 믿음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아무튼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느 직장에 나가 일을 한다고 합시다. 다 안 믿는 사람이고 자기만 믿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적어도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 특별히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직장에 있건 간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어느 직장에서든지 가장 신임을 받고, 가장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예수 믿는 사람은 존경합니다. 별로 하기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오래 전에 한번 청와대에 갔었습니다. 어느 대통령이라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 대통령과 함께 앉아 점심을 드는데,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에 많은 비서들이 있는데 비서들 가운데 몇 퍼센트가 기독교인입니까?' 그랬더니 65퍼센트라고 대답해요. 그 대통령 자신이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어째서 신변에 기독교인을 많이 두고 있습니까?' 다시 물었더니 참 섭섭하게도 이렇게 말씀해요. '그래도 조금 낫거든요.' 지극히 상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안 믿는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는 거예요. 그만만 해도 다행이라 할까요? 그런가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별스럽다는 소리도 있어요. 야단 아닙니까?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잠시 오해는 받을 수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보고 예수 믿으라 했더니 '안 믿어'해요. 도무지 믿지 않아요. 나중에라도 믿을 것 같지 않아요. 언젠가 한번은 자기 집에 그 남편이 술친구를 데리고 와서 술상을 차려 오라 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요구대로 시중을 들었대요. 어느 순간 부엌에 나왔다가 언뜻 엿들으니 자기 남편이 친구보고 '그저 마누라는 뭐니뭐니해도 예수 믿는 마누라가 좋아'하더랍니다. '틀림이 없거든'하고 칭찬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은 '아,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구나' 싶더랍니다.
겉으로는 '안 믿어'하면서 속으로는 '그래도 믿는 사람이 좋아'어때요? 내심으로는 존경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 점이 있어야 돼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에 화형에 처했습니다. 불에 타면서도 아름답게 죽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로마 백부장이 감격한 나머지 '나도 그리스도인이 되겠소'하고 불 속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순교사에 기록된 실화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만큼은 돼야지요. 비록 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는 기독교인에 대한 존경이 있어요. 가끔 보면 교회에 대한 비난도 많던데 그렇게 비난하는 이유도 기대가 있어서인 것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인에게, 교회에 바라는 바가 있어서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제 고향에서 칭찬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자기 고향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선 이 점을 높이 사서 바울이 수행원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을 자세히 볼 때에 디모데는 철저하게 종의 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섬김의 자세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그를 주로 섬기고 자기는 철저하게 종입니다. '왜'라고 묻는 법이 없어요.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머물라 하면 머물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편지를 써주면서 전달하라 하면 전달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가고 오는 문제가 나오는데, 참 대단해요. 어디에 교회를 하나 세워놓고, 바울 자기는 훌쩍 떠나면서 '머물러 있어'하면 디모데는 군말 없이 머물러 있는 거예요. 얼마가 되든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라'하면 와요. '가라'하면 가요. 이것이 디모데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명령에 대해서, 바울의 뜻에 대해서 바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왜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왜 가야 합니까, 왜 와야 합니까?-일체의 반문이 없습니다. 그렇듯 충성되게 섬겼습니다. 디모데는 투명한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감옥에도 같이 가게 되고, 때로는 매도 같이 맞은 것 같아요. 숱한 고생을 하면서 따라다닙니다.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기형아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요 몸은 하나입니다. 손, 발도 넷입니다. 등이 붙었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탈무드의 지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쪽 어린아이를 때려서 울 때에 저쪽도 울면 하나고, 이쪽은 우는데 저쪽은 울지 않으면 둘이다--뭡니까? 아픔이 통해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아픔과 기쁨이 하나되어야 하나이지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기쁨도 고통도 그 평생을 함께 합니다. 끝까지 함께 합니다. 심지어는 전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도 사도 바울의 무덤 밑에 있습니다. 그 시체가 밑에 있습니다. 그 만큼 철저하게 바울과 같이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19-22)'라고 바울은 디모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보이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고 있어요.
디모데도 바울을 믿지마는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진실을 믿고 그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이요, 그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다-온전하게 믿었어요. 놀라운 신뢰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을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대목에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내 참 아들'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를 보내어 수습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의 진실도 믿었고, 디모데의 능력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생산적 기능을 감당할 자로 믿고 있었어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중요한 후계자의 체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설에 따르면 뒷날 에베소에서 감독으로 일한 적도 있고, 마지막에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마지막 말씀을 들어봅시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고 말씀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믿음의 아들로 그를 불렀고, 수행했지마는 이제는 편지 속에서 말씀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그만큼 확실하게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바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소문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알려지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가 디모데의 모습을 봅니다마는 디모데는 알려지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바울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바울의 그 큰 사역을 온전하게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된 사람입니다. 심부름꾼이 되었고, 수행원이 되었고, 희생자가 된 분입니다. Behind man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것만 좋게 생각하여 앞에 있는 사람을 뒤에서 비록, 붙들고, 당겨서 훌륭한 역사를 이루게 한 숨은 공헌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어요. 이렇듯 빛도 영광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러나 바로 이 Behind man이야말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수아가 있었던 것처럼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갈 때에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된 것처럼, 교회사에 보면 분명히 바울이 가면서 디모데가 그 후계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그 충성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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