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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성장과 행복의 자리, 가정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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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일공동체에서 섬기는 재가노인들 140여 가정 중 거의 대부분이 홀로 사시거나 외로운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두세 명이 이웃하여 살고 계십니다.

반평 남짓의 쪽방에 씽크대, 작은 전기밥솥 하나, 냄비와 버너, 몇몇 봉사 아주머니께서 가져다 주신 김치, 깍두기, 멸치볶음 등 서너 가지 반찬을 신문지로 덮어놓은 밥상만이 구석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벽지마다 오래 묵은 곰팡이 얼룩으로 서려있고, 전선 빨래줄에 수건하며 속옷들이 너저분하게 걸려있습니다. 이분들에게는 누구라도 가족이 남긴 빈자리를 대신 채워줄 따뜻한 이웃의 손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다일 복지재단 간사로 봉사하고 계시는 현순옥 님, 한형식 님께서 무의탁 노인들의 동생, 언니,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하고 계십니다.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묻고, 찾아가 차가운 손을 붙잡아 녹여드리고, 쌀 반 가마 어깨에 메고서 방 한켠에 들여놓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 독거노인들의 가슴에 맺혔던 설움이 봄눈 녹듯이 한 순간에 사그러들고 맙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고 낯선 이방인 대하듯 경계하던 태도가 180도 바뀌어 명절이면 동구밖에 나와 고향찾은 자식을 기다리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어느덧 어쩌다 얼굴 한번 보고 스치는 이웃사촌관계를 넘어 피붙이처럼 그렇게 다정다감하기만 합니다.

다일공동체를 섬기는 여러 손길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재가노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그분들의 말벗이 되어주는 이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전하는 수십 명의 백발 어른들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의 활동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재가노인들의 참으로 기구한 사연들을 듣곤 합니다. 한분 두분 소개하면서 어느새 전하는 자나 듣는 자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버리곤 합니다.
왜 그토록 험난한 세월을 사시고서 끝내 서울 한복판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 이곳 청량리 뒷골목까지 밀려오셨는지요?

분명한 사실은 스스로 선택해서 온 분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밀리고 사람에 내몰려 여기에 주저 앉은지가 10년, 20년, 30년. 이제는 이곳을 떠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마련한다는 용기나 기력마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쉴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릴뿐입니다. 물론 독거노인들 중에서 어떤 분은 재활용폐지며 빈병을 열심히 수거하여 자신의 용돈을 벌어 생활하는 분도 계시고요. 떨리는 손으로 뜨개질을 해서 고아들의 조끼를 선물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인생막장에서 피어나서 도시민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해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정겹고 포근하기만 합니다. 이분들이 이곳에 오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서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최근에 최씨 할머니 얘기를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 원산의 루시여고와 구세병원을 독일 선교사와 함께 세운 목사의 막내딸입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왜정 때 처지가 어려운 아이들을 11명이나 길러서 동경유학까지 시키며, 민족의 지도자로 키우고자 했던 기독교계의 선구자입니다. 총각으로 지내던 그가 56세에 비로소 주위의 권유로 인해 장가를 들고, 아들을 셋낳고 칠십에 낳은 막내딸이 할머니였습니다.

열세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보통학교만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왜정 말의 정신대 징집을 피해 급하게 오빠의 와세다대학 동창과 결혼을 했고, 해방 직후 삼팔선이 막히자 남편을 따라, 울며 말리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남한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처음 정착한 곳은 청주 무심천변 1차 피난민 수용소였습니다. 그후 남편이 청주도청 산림계로 취직이 되면서 도청관사로 옮겼습니다. 숨을 돌린 것도 잠시, 6.25 전쟁이 반발한 것이다. 남편은 도청직원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피난을 가다가 철없는 어린 아내를 관사에 두고 갈 수가 없어 잠시 데리러 왔다가 그만 그날 저녁 총살당하고 말았습니다.

혼자된 새댁은 무작정 서울행 열차를 타게 되었고 그때부터 고생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쌍굴다리에 밥한끼 얻어 드시러 오시는 분들이나 홀로 사는 무의탁 노인들 모두 그들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가정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정의 일탈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사랑을 먹고 자란 사람은 건강한 인격체로 사회 어느 곳에서나 든든하게 살아갑니다. 가정에서 삶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전하며 그가 속한 가정밖의 또 다른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심어갑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은 못자리이고, 사회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내가 속한 정원으로서의 가정과 그 정원의 푸른 나무들인 가족들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5월, 가정의 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울며 탄식하는 고아들과 거리의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홀로된 노인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가족같은 이웃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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