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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중의 복음 (행 13: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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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에 설교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나 7장의 스데반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긴 설교를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중심 내용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의 사건으로, 혹은 옛날 이야기로, 혹은 어떤 지식을 제공하자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사건과 우리의 생명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가 오시고 저가 죽으셨다--이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라고 구원을 주제로, 구원을 설교의 목적으로 하여 설파하고 있습니다.
무릇 모든 설교가 다 그러합니다. 반드시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설교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목적이요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 설교에 걸쳐 역사적 사실 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코 어떤 추상적인 진리나 그가 깨달은 어떤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가 통했다든가 우주적인 이치를 발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적 사건을 저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요, 저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을 다시 간추려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역사는 알고 있는데 그 뜻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역사 이해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예언자의 이런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 그들을 40년이나 광야에 두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출애굽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자는 것이냐, 그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구속사적 의미, 그것의 현재적 의미, 어쩌면 영원한 의미,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말하면 역사적 사건을 Christian View,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는 것이요, 좀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적 역사 의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사건을 바로 이해하자, 그래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 사건 안에서 성서적 증거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하신다,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사건을 계시로 받아야 한다--이것을 깨우쳐줍니다. 옛날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설교 방향이요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옛날 스토아 철학에서는 역사는 하나의 원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Cycle line이라고 했어요. 불교에서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역사를 둥글게 보는 것입니다. 윤회적 사건으로, 돌고 도는 것이라고 봅니다.
D&46613;TXT7흥망성쇠라는 것도 돌고 도는 것이다--아닌게아니라 그럴싸해요.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많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엊그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아닙니까? 저는 특별히 옛날에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6&8228;25때 전쟁에 나가 총 좀 쏘았거든요. 중공군하고 마주서서 총을 쏘아보았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중국을 오갑니다. 중국에 가서 천안문 광장에 서보니 기분이 이상합디다. 또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가서 서보니 또 어떻습니까? 역사가 이렇게 바뀝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우방이 되고, 오늘의 우방이 내일은 원수가 되며, 어제 잘살던 나라가 오늘은 비참해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 비참해진 나라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땅히 뭔가를 깨달아야지요.
옛날의 그 찬란했던 문화가 이제는 고고학적 자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로마는 망했고, 왜 베르사이유궁은 망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시황은 무엇을 생각하며 죽었을까요?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역시 돌고 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돌고 도는 것은 순간입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무한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는 사이클 라인이 아닙니다. 직선적입니다.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이 환생을 한다느니 전생이 어떻고 후생이 어떻고 하는 것은 생각이지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전생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요. 시작도 끝도, 알파와 오메가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의식에는 창조, 섭리, 심판이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항상 바르게 계시해주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D&46613;TXTT2 우리는 이런 차원에 다시한번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예언한 바에 대한 성취로 나타납니다. 예언은 있고 성취가 없다면 그 예언은 바람맞은 것입니다. 요사이 보아하면 예언하는 사람은 많은데 성취가 없어요. 이렇다저렇다 많이들 예언하는 것 같은데 맞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지나간 일은 곧잘 맞추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것은 안맞아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취가 있어야 예언이 예언입니다. 성취를 지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취가 사건으로,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만 그 예언의 예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성취(fulfilment)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서 구약성경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예표가 있습니다. 미리 보여준 표가 있어요. 제사가 있지요, 성전이 있지요, 예배, 제사드리는 의식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는 등대가 있고 제단이 있고 제물이 있고 제사 음식이 있어요. 상징들입니다. 예표입니다. 예표에는 실재가 있어요. 실재가 없는 예표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점을 잃은 역사 의식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상징이 있습니다. 상징에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이 있어야 상징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반지라는 것이 사랑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보면서 아, 그거 좋구나, 나도 하나 사서 껴야겠다--이러면 됩니까?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은 준 사람이 있고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준 사람이 없는 결혼반지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한낱 백화점 상품에 지나지 않아요. 누가 주었느냐--그 실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야 그것을 담은 상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없다면 그 많은 상징은 아무 의미가 D&46613; 추천 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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