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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0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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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온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되 비단 추수감사절 하루만 할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성경말씀처럼 일 년 365일 매일 매일을 감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반문하고픈 분들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찾아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 년 내내 감사하고도 남을 만큼 감사의 조건을 주셨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를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저는 성경에 근거해서 감사의 조건들을 생각해 봄으로써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도들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제목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의 형편이 어떠할까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썩어질 이 땅의 것만을 위해서 수고하며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목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지만 의미가 없는 삶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불신 이웃들의 가련한 삶의 본질을 바로 보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6장에는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으므로 죄책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6장 14절에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도들은 사망과도 상관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그 속에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9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속”이란 하나님의 가족, 식구를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왕의 가족을 일컬어 ‘로얄 훼밀리’(royal family)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영예를 누립니다.

하물며 성도들은 일국의 로얄 훼밀리 정도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처럼 영광스러운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그것도 죄 많은 인간이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서 그 보혈로 우리를 씻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은총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이르기를 “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유혹이 다가올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히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이 다가올 때에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얼마든지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과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만났거든 부요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시고 부요 의식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7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절망해서 신세를 한탄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할 법도 한데, 사도 바울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말하기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고 했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냉수 마시고 이 쑤신다'는 식의 허세가 아닙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부요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나야할 순간이 오면 은행에 저축해 놓은 재산이 아무 위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둥 같고 울타리 같던 자식들도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를 붙들어 줄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처럼 큰 힘이 되어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구원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생활을 힘써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소시 적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으로 지냈으므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매우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목자는 양의 생사를 책임집니다. 목자는 양들을 노략질 하려고 기회를 노리는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양들을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날개 아래 품으셔서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그리고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시 91:).

그 다음, 목자는 양들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책임집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육신의 삶도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독생자의 보혈을 주고 사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입히고 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습니까? ‘나의 수완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 8장 18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4장 7절에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건강과 지혜와 재능과 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밤잠을 못자고 수고해서 성공하고 재물을 얻었더라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지고 일해서 얻은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농부가 한 해 동안 땀 흘려 농사를 지었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옳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사고팔고 자기 것이라고 등기소에 소유권을 등기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5장 23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들이 내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임시로 맡아 관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농부는 하나님의 소유인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농사를 짓는데 농부의 땀과 수고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인들은 밥상을 대할 때마다 농부들의 수고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더욱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이제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유엔 식량 관련 인권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8억4천2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 주민들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 탈북자들이 줄을 잇고 있지 않습니까? 매일 매끼 밥을 대할 때마다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감사할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손으로 일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일해서 떳떳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노라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넉넉함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신 데 대하여 감사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거리에 나서는 그 순간부터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는지 모릅니다. 거리에서만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흉포한 자들이 숨어서 사람들을 해칩니다. 돈을 빼앗기 위해서 사람을 납치하기도 하고, 아예 인신매매에 넘기기도 합니다. 어떤 자들은 살인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제 정신이 아닌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갈수록 인간성이 피폐해 져 갑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 대신 인정이 메말라가고,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악한 세태에서 불상사를 만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평안하게 지내온 것은 하나님께서 불꽃같으신 눈으로 살피시고 능력의 손길로 지켜주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요즘 비행청소년들의 문제가 심각한데 우리의 자녀들이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녀들의 마음을 주장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감사할 이유를 생각해 내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시거든 감사의 조건을 하나씩 종이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종이에 적은 감사의 이유를 하나씩 읽어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병폐(病弊)는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과식증(過食症) 환자처럼 항상 욕구 불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미 많은 돈을 벌었으나 만족을 모릅니다. 그렇다고 번 돈을 가지고 선한 일에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재산을 늘려나갈 뿐입니다. 벌어도 벌어도 만족을 모르니 감사가 나올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다 쓰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갑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마 그의 형이 상속재산을 다 차지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훌륭한 랍비로 알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

이 부자가 어리석은 까닭은 영혼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재물을 쌓는 데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졌으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써 바치고,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하는데 힘썼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재물을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시니 그 많던 재산이 그에게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으므로 욕망을 따라 살면 결코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더 정복할 나라가 없다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나라를 정복해서 손아귀에 넣고서도 더 차지할 땅이 없다고 슬퍼하다니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구제 받을 수 없는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때 만족이 있을 수 없고, 만족이 없는 마음에 감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재물의 많음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고 했습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 생활에 힘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원망, 불평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사도는 권면하기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기도할 때도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과 같이 하늘 보좌에 올라갑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4장에는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기름지고 살진 수송아지나 양이나 염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십시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참 감사하다고 말하십시오. 주님의 일에 봉사할 때에도 감사함으로 하십시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봉사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감사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 하루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간혹 보면, 무슨 일에나 불평부터 터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결국은 흠을 찾아내서 불평을 하고 맙니다. 이것은 불평이 습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의 말을 생활화할 때 우리의 생활이 활기차게 바뀝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감사의 조건을 더 많이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노라면 기뻐할 일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전쟁과 살상, 유가 인상과 경제 불안,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피로감, 스트레스가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신 성도님 마다 또 내년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까지 매일 매일 감사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2005-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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