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으로 달라지는 삶 (약 01:19-27)

첨부 1


세상을 이기는 힘 ‘경건’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연말과 내년 초에 이전에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이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러브 호텔’은 불황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제 아이들도 ‘러브 호텔’이 뭐냐고 묻는데 제가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풍성해진 반면, 사람들은 사치와 쾌락을 좇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이 가져다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미국에서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이 가져다 주는 악영향도 많습니다. 일의 양이 오히려 많아지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상이 발달하고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더욱 냉정한 세상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모습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손실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을 이기는 힘은 경건입니다. 경건 외에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식, 권력, 돈으로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은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경건입니다.

경건에 대한 잘못된 오해때문에 사람들은 경건을 멀리합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뭔가 재미없고 지루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좋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금식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것을 생각하며 힘들어합니다.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쉽고, 경건하게 사는 것은 힘들고 괴롭고 어려워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경건은 우리에게 유혹을 이길 힘과 세상을 이길 힘을 줍니다. 진정한 자유와 참된 평안을 줍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세상을 추구하고 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잘 말하고 있습니다. 19,20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경건은 어렵지 않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를 더디하기만 해도 경건해 집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듣기를 싫어합니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조급합니다.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고 경건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경건이 없으면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상담은 잘 들어주는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적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어떠한 해결책보다도 나을 때가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잘 살지만 외롭고 고독합니다. 자기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말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소리가 커집니다. 결국은 화를 내고 맙니다. 그러면 더 듣지 않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분노의 결과
경건을 이야기 할 때 침묵은 기본입니다. 침묵하는 이유는 듣기 위해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도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침묵하십시오. 참된 말, 창조적인 말, 생명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옵니다.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나오는 말이 사람을 살리고, 용기를 주며, 영향력을 줍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들을 말이 아닌 것은 다 소음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반드시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화를 내면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의로운 분노는 있습니다. 불의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정당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신경질을 내고 소리를 지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계속하게 되면 결국 살인으로까지 발전하고 맙니다. 성을 내지만 않아도 살인은 없습니다. 홧김에 저지르는 실수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때 한번 참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얼마나 후회를 많이 합니까?
인내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분노와 상처가 치유되어야 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말을 충분히 듣지 않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충분히 듣지 않고 조급하게 말하고, 자기 의견과 자기 주장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그는 정말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화를 내실 때 모세는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실지라도 이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도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므리바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내가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
말을 더디하고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말을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며 성내지 않기 위해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밭을 먼저 기경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길가나 돌밭에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가시를 제거하고 돌을 제거하고 흙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립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습니다. 사람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의 고집과 강퍅함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듣는다고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가 그냥 들리십니까? 듣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관심이 없거나 다른 생각을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 말을 듣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습니다.

잘 듣기 위해 우리 안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다 뽑아내야 합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음란함이 다 제 안에 있습니다. 만물보다 심하게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있는 죄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기 위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과 불순종과 더러운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억지로 교회에 와서는 은혜를 받기 힘듭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변화되지 않는 것은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악을 뽑아 버리고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참으로 무지합니다. 수 천년에 걸쳐 수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말씀이라면 적어도 한번 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들음’과 ‘행함’
22-24절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속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면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된 것 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착각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은 설교자인 제 자신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 남을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듣고 행치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듣고 행치 않는 것은 불신입니다. 귀담아 들으면 변화됩니다.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기꾼의 말도 귀담아 들으면 결국 속고 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습니까?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는 잘 했는데 행동이 안된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행동이 없는 것이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도’는 길입니다. 좋은 길을 두고 나쁜 길로 가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말씀은 길입니다. 길은 가야 합니다. 길은 보기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해야 합니다. 가야 합니다.
‘거울 비유’를 아십니까?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은 거울을 보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은 자기를 단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거울을 보고서도 자기의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얼굴은 잘 알아도 자기 얼굴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본인입니다. 제가 4년만에 여권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낯선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듯이 내 속사람을 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십시오. 말씀이 영혼의 거울입니다. 말씀 앞에 서야 비로소 자기 영혼의 모습이 보입니다. 말씀 앞에 서야 온전케 됩니다. 반대로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영혼은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을 때 제거할 수 있습니다.

QT의 적용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고치십시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은 여러분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 주는 말씀을 통해 날마다 자기 영혼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는 정원사를 데려다가 가꾸고 또 가꾸어야 합니다. 정원보다 더 예민한 것이 우리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돌보지 않으면 금새 오염되고 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QT를 날마다 하십시오. 하용조 목사님의 꿈은 모든 사람이 매일 아침 QT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을 통해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진실하고 경건하게 살기로 날마다 결단한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온전케 하는 법
25절을 읽겠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왠지 ‘율법’이라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안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지켜야 하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교통법규도 지켜야 합니다. 국회법도 지켜야 합니다. 회사법도 지켜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법이 아니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받는 사람은 말씀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씀의 실체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얽매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영혼을 더러운 것과 악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이뤄가는 경건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26절은 다시 한번 혀를 절제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경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경건한 모양은 있을지 모릅니다. 경건한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교회가 시험에 드는 것도 말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언제나 축복의 말, 찬양의 말, 감사의 말, 믿음의 말이기를 바랍니다.

경건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먼저입니다. 자기를 지킨다고 노력하다 보면 정작 사랑을 실천하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 때 인색해지기 십상입니다.
이 내용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를 지키려다가 강도만난 자를 멀리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형식적인 경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웃들이 신음하는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은 모두 조금씩은 더럽고 불결하고 추합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해야 합니다.

27절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가장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주었을 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을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도움을 주었을 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시장에 있습니다. 이웃에 있습니다. 경건한 삶은 가난한 이웃에게 있습니다. 이웃과 사랑과 자비를 나누고 함께 할 때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께 영광을 돌릴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