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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계 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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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자'가 몇명 있기는 하였지만(3:4) 그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칭찬의 말씀도 하지 않으신채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라는 책망부터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었던 것은 바로 사데 교회가 이처럼 죽어 있어서 하나님의 영으로 살리려 하신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전통은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지 않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교회로서는 명성은 있으나 행함이 없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 우리들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신앙인이라는 것은 허울 뿐, 네 믿음은 죽은지 오래구나. 네 육체는 살아 있어서 교회에 드나들고 있지만 네 영혼은 죽은지 오래구나.'
 
주님은 사데 교회 교인들에게 영적 각성을 촉구하셨습니다. 아울러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의 그 감격을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의 심판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날은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몇 명의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것이라는 약속(3:4)이 주어집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와 함께 나염과 염직이 발달된 도시였습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는 비유의 말씀은 사데의 이러한 특성에서 연유된 것이며 '흰옷'은 그만큼 순결하고 죄에 물들지 않았음을 암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성도들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이기는 자에게는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할 권세가 주어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친구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5절).
 
이기는 자에게 나의 새이름을 주리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자랑할만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예수님께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그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은 것을 높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런 점을 칭찬하신 것은 참 의미가 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신앙이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신한 교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별로 내 놓을 것이 없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고 열심히 노력한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태인들의 훼방 때문에 괴로와하고, 자신들의 연약함에 자신없어 하는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두가지를 약속하며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첫째, 그들을 괴롭히던 자칭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 앞에 굴복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 기독교인들은 박해하던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이라기보다 같은 민족으로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믿음이 많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책망하시고 그 유대인들을 그들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그들보다는 연약한 믿음을 붙들고 서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 교인들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장차 이 세상에 시험의 때가 올 때 그 시험을 면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을 때를 면하게 해준다는 것은 시험 그 자체를 피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쓴 희랍어 원어 '엑크'는 '피하게 한다'는 뜻보다는 '정면 대결해서 이기게 한다'는 뜻이 더 강합니다. 다시 말해 시험의 때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믿음을 굳건히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처럼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을 지키시려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부디 그 믿음과 인내를 굳게 지켜서 주님이 약속하신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까지 굳건히 지킨 승리자에게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12절)는 더 큰 약속의 말씀도 주십니다.
 
기둥이 상징하는 것은 안전하고 튼튼하고 오래도록 남는다는 것입니다. 승리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고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약속의 견고함과 영구성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승리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는 영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둥에는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주님의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이름은 새사람을 말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사울이 바울이 되듯, 누구나 예수를 믿기 전에는 어떤 이름의 어떤 사람이었든 그에게 새이름이 새겨지는 날 그는 완전히 다른 새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새이름을 받은 그는 주님의 사람이며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긴 승리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인쳐지는 것입니다.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면 뱉아버리리라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를 관통하는 세 도로의 교차지역이었기 때문에 사업과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또 이곳은 목직업이 발달하였고 명성있는 의술학교도 있어서 안약의 생산지로도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3장 18절에 '의복'과 '안약'을 비유로 드신 것은 라오디게아가 이렇게 직조업, 의약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 세상의 가치만 추구하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는 생동력이 없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그들의 무지와 미지근한 충성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신앙은 외적인 박해와 압력이 있을 때 더 강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궁핍하지도 않고 이단의 유혹이나 유대인의 훼방도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이 뜨겁게 타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님을 배반할만한 자극도 받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그런 무책임하고 뜨뜻 미지근한 태도를 나무라셨습니다. 주님께 뜨겁게 열성을 보이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차갑게 돌아서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이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분명한 뜻을 밝히셨습니다(15-16절).
 
라오디게아 북쪽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는 뜨거운 온천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남쪽에 있는 도시 골로새는 냉천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라오디게아는 미지근한 물이 있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쓰인 '미지근하다'는 표현을 그들은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잘못은 미지근한 태도 뿐만 아니라 무지함에도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외적인 부요함이 영적인 부요함까지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칭 부자라 하여 자만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 영적 빈곤함이 마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 신세와 같다고 날카롭게 지적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위 가졌다는 것이 모두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해서 일깨워 주십니다.
 
'네가 금을 가졌다 하나 그것은 불로 연단하지 않아 곧 닳아 없어질 것이니 나에게서 연단한 금을 사서 참된 부곧 참된 삶의 가치를 누리고, 네 스스로 좋은 모직 옷을 입었다 하나 실상은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으니 내게서 의의 옷을 사서 입으라. 또 네가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고 하나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으니 부디 내게서 안약을 사서 발라 영적인 눈을 뜨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라'(18절 참조).
 
주님은 그들을 심히 꾸짖기만 하신 것이 마음 아프신듯 곧 마음을 바꾸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3:19).
 
아무리 주님을 향한 믿음이 미적지근 하여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여전히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의 사랑이 그들을 책망하게 한 것이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리고나서 주님은 전체 교회를 향해서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리라....'(20-21절). 이 구절은 이미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밖에 서서 두드리는 문은 어느 도성의 문이나 또는 교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문, 심령의 문입니다. 이미 일곱 교회가 있었던 일곱 도시의 성문들은 로마제국의 군대가 두드려부셔 활짝 열려진지 오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강압적인 폭력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은 '문밖에 서 계시지'결코 강제로 문을 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문은 밖에서는 결코 열 수 없고 안에서만 본인이 스스로 열 수밖에 없는 그런 문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스스로 심령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라고요. 그러기에 그는 사랑의 실체이십니다.
 
이때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그는 승리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기는 그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 영광의 길은 하늘나라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을 영접한 자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구체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그렇게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하였던 이들이어야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청은 이렇게 '현실'에서 시작하여 '이상'으로 끌어올리시는 매개체로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주님을 향해 심령의 문을 여시고 그를 영접해 드립시다. 그리고 이 어려운 세상을 그와 더불어 살고, 그래서 이 세상을 이기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하여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승리의 기쁨을 같이 영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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