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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모양 (계 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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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에 대한 영상과 말씀을 보고 그리고 듣고난 후에 사도 요한은 다시 영적인 세계에 몰입해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모든 신앙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에 접하게 됩니다. 신구약 성서를 통해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 체험을 했었으나 그 분의 모양에 대하여 명확한 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 기록자의 표현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우선 그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었고, 그가 들으니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시종 일관 이렇게 영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 있어서 보고 듣는 일이 병합되어 있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 곳에 신앙의 안목이 열려 보고 있었으며, 육체의 귀로 듣고 있지만 실은 심령의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영적 세계와의 접촉은 이렇게 보고 듣는 일이 조화를 가지고 확실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곧 성령에 감동하였다'고 기록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요한은 입신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제부터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찬란한 빛이시라
 
'하늘에 한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이 있었는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이 보였습니다'(4:2-3). 이것이 첫묘사였습니다.
 
'보좌'는 지존하신 분이 임재해 계신 자리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요한은 분명히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셨다고 하였으며 그 분의 모양을 그려냈습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결코 흔치 않습니다. '벽옥'은 유대교 대제사장의 겉옷 흉패에 장식된 12개의 보석 가운데 맨 끝의 것이며, '홍보석'은 그것들 가운데 첫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분석에 의하면 벽옥은 오늘날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고 홍보석은 홍옥(cornelian)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결국 이 묘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보석이 함게 해서 발하는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을 때도 그를 빛이라 하였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더라'(요1:9-10)는 말씀도 요한의 기록이었습니다.
 
또 요한은 그 보좌 주위에는 녹보석같이 빛나는 '무지개'가 둘려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녹보석'은 오늘날의 비취옥(emerald)이라고 합니다. 보통 무지개는 아아치형인데 이 무지개는 이상하게도 그 보좌를 빙둘러 있었다고 하니 원형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의 노아에게 보여주셨던 무지개는, 구름 속에 느리워 땅과 하늘을 잇는 반달형이었으며 비가 그치고난 직후 아직 빗방울이 맺혀 있을때 나타났을 터이니,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의 뜻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의 눈에 비춰진 무지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영사되어 사면 팔방으로 칠색창연하게 뻗어나간 파문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귀하심을 나타내주는 영광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 4절의 묘사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 보좌에서부터 차례차례 입체적으로 그려가려고 한다면 8절 후반에나 또는 9절 끝에 있어야 우리가 더 쉽게 영상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에 의하면 이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뇌성'이 만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번개(lighting)는 빛의 연속이요 뇌성은 음성의 파장입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은 촛불이 아니고 횃불로서 성령으로 가득찬 분위기를 일컫는다고 하겠습니다.
 
6절의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었다'고 한 것은 빛과 소리가 멀리 퍼져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기록자가 밧모섬에서 일곱 교회를 그려볼 때 빛에 반사된 바다면이 유리 바다 같을 수 있을 것이며, 서향이나 동향에 빗긴 태양의 반사는 마치 수정처럼 아름다왔으리라 보여져 이러한 영상들의 투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이렇게 넓게 전개되는 보좌 주위의 모습 다음에는 움직이는 생물체가 네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네 생물은 고정체가 아니고 좌우 앞뒤 위아래로 진행하고 있엇다고 보는 것이 실감을 더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물체는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했고,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밤낮 쉬지 않고' 찬양했다고 기술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네 생물은 무엇을 뜻하는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4:7)고 일일이 지적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네 생물에 대하여서는 구약성서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이를테면 에스겔 10장 14절 이하에는 '그룹'(cherubim), 이사야 6장 2절 이하에는 '스랍'(seraphim)이라는 복수형 단어로 각각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시위하며 그 보좌를 지키는 천사장들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각기 다르게 묘사되서 그 모양을 놓고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가지 해석이 따라다녔습니다.
 
A.D.170년경 이레네우스는 그 네 생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네가지 측면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네 생물의 상징은 네 복음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것들이 복음서들을 일컫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생물이 어느 복음서에 해당하느냐는 것도 교부들의 주장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오늘날까지 널리 통용되는 것은어거스틴의 해석이었다고 봅니다. '사자'는 마태복음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권위를 뜻한다고 하였고, '송아지'는 누가복음서의 상징으로서 희생과 약자 보호의 뜻으로 풀이되었으며, '사람'은 마가복음서로서 그리스도의 화육과 인간성을 표출해 주었으며, '독수리'는 요한복음서를 일커르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와 공관복음적인 안목 곧 복음의 조감도적 의미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서 교회 건축 양식에도 이 네 생물의 모습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특히 색유리 장식(stainedglass windows)에 많이 쓰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주님의 말씀인 복음서들로써 펼쳐질 수 있으며, 또 그 보좌를 받들어 모실 수 있는 관문도 복음으로써 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유추해 볼 때 앞서 해석되었던 네 생물들의 상징은 있음직한 연상작용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24장로들은 누구인가
 
그 다음에 드디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보좌 주위에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4:4). 이 장로들이 누구냐하는 문제는 간단히 풀리지 않습니다. 몇가지 가능한 해답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독자인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장로들이란, 구약성서에 명시된 바로는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보좌에 좌정하셨을 때 대체로 그 주위를 둘러 앉은 의회원들이 함께 했었다는데,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것입니다(왕상22:19,욥1:6,2:1,사24:23,cf.창3:22).
 
둘째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당시 성전을 받드는 제사장들은 레위 족속으로서 24반열로 나뉘어 봉사하였는데 그 대표자들을 의미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역대상24:7-18,25:6-31).
 
셋째로 가능한 해석은 24장로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족장들과 12사도들을 합해서 그들을 일컫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째로는 바빌론 종교의 제의에 의하면 24 별 자리에 해당되는 24 천사들로 보자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요한계시록'안에 장로들의 역할이 여러번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모두 검토해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 또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신앙인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흰옷이 입혀졌거나 주어졌고(3:4,4:4) 또 면류관이 약속되었거나 주어졌습니다(2:10,14:3). 그리고 그들은 또한 한결같이 주님을 찬양하였으며(5:11,14, 7:11, 11:16, 14:3, 19:4), 주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였고(5:8), 심지어는 사도 요한이 슬퍼할 때는 위로(5:5), 모를 때는 해석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섯가지 설명들 가운데 어느 것을 취택하시겠습니까. 스스로 선택하셔서 여러분 각자에 마땅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엄위로우신 하나님께 드릴 것은 찬양 뿐
 
지금까지 설명한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모양'과 그 주위에 전개되는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영상화해서 여러분이 이제부터는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의 소리와 함께 들음으로써 시청각적인 효과를 만끽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8절의 찬양 내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영원하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11절에서 한발 더 내딛어 하나님께서 네 생물들의 찬양 내용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찬양하였습니다. 특별히 주께서 하늘나라에 계시는 영적 존재이시면서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또 그 만물이 주의 뜻대로 영위되도록 구체적으로 관여하신다는 것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은 네 생물이 다만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한 거소가는 달리 이십사 장로들의 인간적인 관심과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밝혀준 것으로서 신학적인 의미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존귀하시기만 한 존재가 아니고 대자연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관자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과 대자연의 찬양뿐 아니라 인간의 찬양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만이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없건만 왜 유독히 인간만 그 뜻을 저버리고 사는 것일까.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신실한 장로들의 찬양을 따라 우리도 주께 존귀와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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