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계 05:1-14)

첨부 1


요한계시록 5장은 하나님 책의 인봉을 땔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과 좋은 대비가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책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신비스런 계획과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에 마당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소리를 듣고 하늘에 올라간 요한이 그 책을 보는 순간 가졌을 기대와 흥분은 짐작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듯 곧 천사의 큰 음성이 외칩니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5:2).
 
사실 그 책은 하나님이 봉하신 일곱 인을 감히 떼내지 않고는 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책에 봉인이 일곱번이나 돼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그의 피조물들에게 그만큼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며, 결코 아무나 쉽사리 펼 수는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책을 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온전히 이루어 내기에 합당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요한은 결국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다'(5:3)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울고 맙니다. 하나님의 책을 펴볼 수 있다는 기쁨에 벅차 있던 그가 돌연 우주 안에 있는 어느 피조물도 그 책을 펼 자격과 능력이 없어 영원히 그 비밀을 알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그렇다고 울기까지 할 일인가'하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의 입장을 나 자신이라고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요. 내가 요한처럼 절호의 기회로 입신하여 하늘의 메시지를 받게 된 찰나에 도로 그것이 거두어졌다면 그 실망이 어떠했겠습니까? 하기야 그 실망의 심도는 우리들 신앙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
 
우주 안에 있는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고 먼저 못박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목적을 수행할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 모릅니다. 울고 있는 요한을 장로 중 하나가 달래며 이렇게 안심시킵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5).
 
하나님의 목적과 심판을 온전히 이루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칭호는 '유대 지파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라는 칭호는 야곱이 임종 직전에 그의 아들들에게 했던 축복에서 따 온 것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새끼 사자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8-10). 이구절은 유다를 사자 새끼로 비유하는데, 사자가 백수의 왕이며 용기와 힘의 구체적인 상징이듯, 유다 지파는 그의 형제를 지배하고 나아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며 마침내는 하나님이 임명한 모든 나라들의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후손인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유다 지파에게 하신 약속을 실현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왕위의 상속자이시며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왕국의 통치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다윗의 뿌리'라는 말 또한 그것을 의미합니다(사11:1,10). '뿌리'라는 말은 '조상'을 뜻합니다. 또한 이 말속에는 거꾸로 '자손'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의 '조상', 즉 '다윗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영상화할 수 없는 어린 양의 모습
 
사도 요한이 장로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일곱 뿔과 일곱 눈이 달린 어린 양이 섰다는 내용이 나옵니다(5:6). 이 대목은 얼핏 생각하면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장면입니다. 어린 양 한 마리가 어떻게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동시에 서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점 때문입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 장면을 머리속에 영상화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네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여섯이 있는데 그중 둘로는 눈을 가리고 또 다른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고 있습니다(사6:2참조). 이십사 장로들의 보좌 역시 살아서 움직이는데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공 모양을 이루며 빙 둘러 있습니다. 어린 양은 바로 이 장면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 한 마리가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잉에 동시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logos)이시요 생명(life)이시고, 빛(light)이시요 사랑(love)이십니다. 주님은 이 네가지 속성이 한데 합쳐져서 존재하는 분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본 것처럼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 사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빛의 속성으로 이 장면 속에 대비시킬 때 어린 양은 단어 그대로 털이 보글보글한 양이 아니라 양 모양으로 보여지는 빛, 그 자체인 것입니다. 빛은 어느 곳에나 존재합니다. 주님은 빛으로서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대비시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나와 내 남편 사이에, 나와 친구 사이에, 아니 인간들 사이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어린 양을 볼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 장면은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린 양'이라는 표현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이라고 하면 다만 한 마리 새끼 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문제점입니다.
 
본래 양이란 단어는 영어의 'sheep'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쓰인 양은 'Lamb'입니다. 이 단어는 물론 새끼 양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바쳐도 흠이 없는 깨끗한 양을 말합니다.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뿔이 일곱개나 달린 양이 우리말의 뉘앙스대로 단지 새끼 양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에 등장하는 양은 고난을 거쳐 세상을 이긴 승리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어린 양의 몸에 '일찍 죽임을 당한 것같은'흠집이 나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얻은 승리의 상흔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은 왜 죽어야 했나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9-10절에 나오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말이지만 그 실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백년 동안 신학자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연구해 온 내용이 이 귀절에 압축돼 있습니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라는 물음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꼭 죽이셔야 했을까요. 더구나 십자가에 달리는 수치를 당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실제적인 죽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처럼 죽으셔야 했습니다. 철저한 현실 참여의 정신입니다.
 
둘째, 희생적인 죽음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썩어야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듯 생물을 바쳐야 또 다른 생물을 얻어내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들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셋째, 사랑의 본을 보인 죽음이었습니다.
밀알이 죽으면 그와 꼭 같은 밀알을 생산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을 살리신 우주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내 몸을 던져 전부를 건져냄으로써 사랑을 실현한 죽음이었습니다.
 
넷째, 죽음을 이긴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삶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며 기독교 신앙인을 승리로 이끄는 열쇠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설사 실패했더라도, 설사 망했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와 같은 네가지 의미가 담긴 내용을 사도 요한의 입을 통해 풀어 내는 하늘의 서사시가 바로 9절과 10절의 찬송입니다. 이것을 계시록은 '새 노래'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대합창
 
사실은 이 새 노래가 언제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7절) 24개의 거문고(harp) 전주가 고요히 흘러나왔고, 24개의 금향로에서 신앙인들의 기도가 향으로 가득히 퍼져 나갔습니다(8절). 이 때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행동은 그만큼 위대한 역사(役事)의 첫 동작이었다는 것입니다.
 
새 노래의 처음 찬양은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부릅니다. 원어를 보면 주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당신이야 말로 그 두루마리 책을 받아쥐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나이다'라고 영창합니다. 그리고 10절의 가사는 이렇게 풀어 읽으면 더욱 은혜가 됩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나라가 이룩되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주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나아가 그들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세상을 이겨서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이 노래가 끝날즈음 이번에는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서서'(11절) 큰 음성으로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 노래는 3인칭으로서 그리스도의 7가지 속성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12절). 그런데 이것으로 합창이 끝나는가 했더니 그 다음은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함께 화답하여 대합창을 이룹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대우주의 찬양과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이신 어린 양 뿐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예배의 클라이막스 같은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맨 끝은 '아멘'하는 송영이 네 생물들에 의해서 불려지고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한다'는 장면으로 막이 내려집니다. 이것은 상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우리가 앞으로 직접 이런 경지에 이르러 체험한다면 얼마나 기쁘랴.
 
이 모든 장면은 마치 온 누리가 자연과 역사를 엮어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대예배 같으리라. 그 시작은 하프 전주를 따라 남성만이 부르는 그레고리안 영창(Gregorian Chant) 같고, 예배의 중간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천사들이 영광송으로 화답하니 그것은 아그누스 데이(Agnus Dei)혼성 합창 같고, 모든 만물이 함께 해서 오케스트라를 이루어 심포니를 엮어내니 예배의 절정은 주치에 달한 것 같고, 네 생물의 사중창과 이십사 장로들의 남성 영창이 '아멘, 아멘'을 반복하면서 예배를 마감하니 이것이야말로 천국의 잔치 같지 않은가. 이 감격 자주 반추해 봄직 하리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