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심 (계 07:1-17)

첨부 1


지난번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환상이 전개될 때 그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와 일곱째 환상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다른 계시가 삽입됩니다.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인맞은 십사만사천명의 무리와,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의 모습이 소개되고(7장),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는 '작은 책'을 가진 천사와 '두 증인'의 환상이 나타납니다(10,11장). 마지막 여섯째 대접과 일곱째 대접 사이에는 개구리와 같은 세 더러운 영의 환상이 나타나는데(16:13-16) 이렇게 삽입된 환상을 '보충계시' 또는 '삽입계시'라고 부릅니다. 보충계시는 그때까지 된 일을 되새기고 설명하거나 앞으로 될 일을 예증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부하는 7장은 여섯째 인을 떼고 나서 일곱째 인을 떼기 직전에 나오는 보충계시 부분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인치는 일과 보좌 앞에 나타난 수많은 성도의 모습은 여섯째 인의 마지막 대목에서 '진노의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마지막 환난에서 벗어나게 될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입니다.
 
인을 치는 까닭
 
여섯째 인을 떼고 전개된 그 무서운 환난들이 지나고 난후 갑자기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가 깔리는데 그 이유는 네 천사가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그들이 손을 놓기만 하면 바람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씌어질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람은 지역의 특성상 사막의 열풍이었습니다. 그 열풍은 한번 불어닥쳤다 하면 바다에 폭풍을 일으키고, 땅의 식물을 말려 버려 사막같이 만드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은 일곱째 인을 떼고 나면 바로 그 바람이 세상을 휩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 동안 바람을 멈추게 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환난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쳐서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종류, 또는 어떤 모양의 인을 친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인이 어떤 것이든 인을 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소유의 표시입니다. 소나 말 같은 가축을 방목할 때 그 주인이 자기 가축의 엉덩이에 특정한 무늬의 화인을 찍어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아모스8:6참조).
 
둘째는 안전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마치 KS마크가 품질을 보증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참 신앙인임을 보증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징표입니다(마27:66참조).
 
세째로 원천을 확인해 주는 표시입니다. 성령을 시금석으로 하여 그 소속의 뿌리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에스라3:12참조).
 
그런데 여기에서 인침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목사와 같은 교역자들에게만 인을 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침을 받으려면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 에서만은 안되며 예수님의 본을 받아 남을 섬길줄 아는 삶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생활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사만사천 명이란 무슨 뜻?
 
바람이 정지돼 있는 사이에 인맞은 사람의 수는 십사만사천 명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들을 '유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라며 계속 불러 나가는 것으로 보아 인 맞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 명씩 뽑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세히 읽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우선 넷째 아들인 유다 지파가 맏아들인 르우벤에 앞서 첫번째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서열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맨 처음 나온 것은 유다 지파가 메시아를 배출해 낸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순서가 바뀐 것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을 맞기만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열두 지파 중 빠진 지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 지파입니다. 단 지파는 우상을 숭배했고 그들 중에서 적그리스도가 자꾸 나타났기 때문에 제외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단 지파 대신 선택된 것이 므낫세 지파인데 므낫세는 에브라임과 함께 요셉의 두 아들 중 하나로 아주 작은 지파입니다. 같은 요셉의 아들이면서 강성했던 에브라임 지파가 빠진 것은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을때 10개 지파가 뭉쳐 있던 북이스라엘을 통틀어 에브라임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별히 구별해 지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사만사천이란 숫자를 수학적인 실수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묵시적인 수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한때 교계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수학적인 실수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6장 11절의 말씀대로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심판의 날이 온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일점 일획도 바꾸지 않고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십사만사천이란 숫자는 수학적인 숫자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수라는 것을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 구절이 증명해 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7:9-10).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첫째, 십사만사천이란 수는 사도 요한이 '인맞은 자의 수를 들은 것'(7:4)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보니 구속 받은 자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정도였다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공부했던 것처럼 히브리 사람들은 3은 하늘의 수요, 4는 땅의 수로서 3과 4가 곱해진 12를 완전한 수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파도 열둘이고 예수님의 제자도 열둘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10을 꽉 찬 수라고 믿었고 10을 세번 곱산 1000이란 수를 더 찰 수 없는 완전한 수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이란 수도 이런 발상에서 12 X 12 X 1000을 계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열두 지파와 신약 시대의 열두 사도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말해 줍니다. 즉 인맞은 무리는 신구약 전체의 모든 교회, 즉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저는 그 누구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구원함을 받게 된다는 말씀에 큰 안도를 느끼고 새삼스레 하나님의 사랑을 절감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의인 10명을 찾지 못해 멸망을 당한 것처럼,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의인만을 찾으신다면 몇명이나 구원 받겠습니까. 주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로 오셨기에,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그 많은 무리들이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큰 무리가 순전히 열두 지파만을 의미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사람들은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 요한이 묻지도 않는데 장로 중 하나가 그 무리들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를 일러줍니다. 그들은 바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환나에서 나온 무리들은 승리자의 상징인 흰 옷을 입고 손에는 역시 승리자가 드는 종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을 극복하고 재화에 쓰러지지 않고 승리한 자들입니다.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 '승리'는 남을 거꾸러 뜨리고 내가 이기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나 자신과의 투쟁에서 이기는 것이며 그것에 승리하고 나면 이 세상 전부를 놓고 싸워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이긴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 즉 인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장막을 치시고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심
 
인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며'살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장막'을 쳐 보호하시는데 그 장면은 상상만 해도 부럽고 은혜로운 광경입니다. 광야와 사막 지대에서는 장막복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그것은 집입니다. 오늘날 주택문제제를 해결해 주는 것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장막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가운데 상하지 아니할' 것이랍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49장 10절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오늘 말씀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구절입니다. 이는 주께서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싯어 주실 것임이러라'(17절)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모아 미래에 투사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현재의 우리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강조하신 말씀이 바로 '나는 선한 목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이끌어 주시면 나는 목마르지도 않고 주리지도 않고 아무런 해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셔서 영생을 영위할 수 있게까지 해 주십니다.
 
생명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우리들의 삶이 새로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앞당겨 살게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결코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습니다.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시는 주께 나아갑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